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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Apr 07. 2024

[11] 과자집을 만난 헨젤 혹은 그레텔

런던여행기_사랑스러운 로컬 맛집



R과 나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WB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나섰다. 사실 이 환상적인 장소에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더 이상 육체적인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내부에 카페테리아가 있기는 하나 거의 중고등학교 구내식당과 같은 느낌이라 그곳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슬슬 출출하기도 하고 기력 소진으로 더는 허리를 곧추세우기 버거워져 오늘의 스튜디오 투어는 여기서 마치기로 결심했다.


빛과 환상으로 가득 찬 마법의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곧바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햇빛 한줄기 없는 깜깜한 저녁의 하늘 아래 비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과도 같은 옥외주차장이었다. 이것 또한 투어 내 계획된 코스인가 싶을 정도로 마법 세계와는 완전히 딴판인 머글 세계가 눈앞에 턱 놓였다. 마법 세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켜 주기 위해 의도된 연출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돌아가기 위해 R과 나는 스튜디오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찌나 비바람이 몰아치던지 한라산 꼭대기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버스는 올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둠의 버스 정류장에 한참 동안 가둬 놓았다. 버스는 고사하고 금방이라도 디멘터 무리가 몰려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새삼 우리나라의 콜택시 앱 시스템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다 함께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난 후에야 버스는 어둠 속에서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안락한(?) 버스 안에 앉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설렜다. 그러고 보니 이 셔틀버스는 나에게 올 때도, 갈 때도 모두 설렘을 안겨다 주었다. 물론 그 설렘이 좀 다른 설렘이긴 하지만 말이다.


R과 나는 버스 안에서 한국인의 국룰 대화주제인 MBTI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와 내가 불편함 없이 서로 잘 어울린다 했더니 우리의 MBTI가 꽤 비슷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녀와 나는 둘 다 _ _ T _형 인간이었다. 어쩐지 대화가 편안하더라니.

저의 MBTI를 맞혀 보세요. 이 중에 있습니다.



R에게 저녁 선약이 있어 아쉽게도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사실 나의 경우, 스위스인 친구가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를 만나러 런던으로 날아오겠다고 즉흥적인 제안을 하여 오늘 하루종일 그 친구의 기별을 기다렸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런던 심포니의 연주회에 함께 가자며 즉시 티켓 예매까지 하여 내게 사진을 보내주더니 마치 어젯밤 모든 대화가 꿈이기라도 한 듯 그와의 연락이 갑자기 두절되었다. 그가 바쁜 와중에 무리하게 짬을 내어 온다고 했던 터라 바빠서 미처 연락을 못 하고 비행기를 탔겠거니 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녁 시간을 넘기도록 그의 회신을 기다렸지만 끝까지 울리지 않는 메시지함에 결국 체념하고 혼자 늦은 저녁을 먹기로 결심했다.


첫째 날에도 언급했듯 저녁 런던의 번화가에서는 음주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숙소가 있는 동네로 돌아와 구글맵과 함께 추적추적 비 내리는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거리를 걸으며 괜찮아 보이는 카페가 나타나면 그 즉시 구글맵을 켜 방문자 리뷰를 확인해 보았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한 카페,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동네 맛집인지 한적한 거리와 대비되는 북적북적한 내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치 나를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기적처럼 딱 하나 남아있는 테이블에 냉큼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왼쪽 테이블에는 멋진 옷차림을 한 나이 많은 두 여성이 와인 한 병을 사이에 둔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오른쪽 테이블에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노트북 화면의 찬란한 불빛을 얼굴에 새기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과제를 하고 있는 걸까? 내 대각선 맞은편 테이블에는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두 명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느낌상 그 둘도 나처럼 런던에 여행 온 외지인인 것 같았다. 그 옆으로 가족인 듯 보이는 세 명의 무리가 식사 중이었고 그 뒤편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카페 안을 빈틈없이 꽉꽉 채우고 있었다. 작은 공간 안이 대화로 가득 차 어떤 말소리들이 떠다니고 있는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안락하게 느껴졌다. 춥고 축축하며 고요했던 바깥과 달리 이 안은 따뜻하고 북적북적하며 맛있는 냄새까지 나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 과자집을 맞닥뜨린 헨젤 혹은 그레텔이 된 것처럼 순간적인 안락과 안도감 같은 것이 내 몸을 훅 감쌌다.



비 오는 한적한 거리에서 찾아낸 따스한 카페.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대부분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직원은 내게 친절한 미소와 함께 메뉴판을 건네주고 갔다. 자리로 메뉴판을 가져다줬으니 주문도 자리에서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카페 내부를 둘러본 바론 직접 바(Bar) 카운터에서 주문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혼란스러웠다. 고민하다가 나는 내 왼쪽에 앉은 두 여성에게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상냥한 미소와 다정한 말투로 나에게 직접 가 주문을 하면 된다고 알려주었고, 덧붙여 여기 직원은 매우 친절하고 다정하니 당신이 어떻게 주문을 하든 상관없다고, 편한 방식대로 하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한 뒤 카운터로 당당하게(?) 걸어가 치즈와 햄을 넣은 크로와상 그리고 롱블랙 한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내가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영국 음식은 맛없다는 소문이 하도 파다하여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게 웬걸! 그저 햄과 치즈를 넣었을 뿐인 이 크로와상이 이렇게나 맛있다니! 제법 큼직한 크로와상 사이에는 녹진하게 흘러내리는 치즈가 듬뿍 들어 있었고, 햄은 간이 아주 적당하여 크로와상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커피는 매우 진하고 향 또한 짙어서 약간은 느끼할 수 있는 샌드위치와 고소한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음식 맛은 매우 좋았고, 카페 내부도 포근하고 유쾌하였으며, 직원은 듣던 대로 과연 매우 친절하였다. 이런 카페를 찾아낸 나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끼며 흡족하게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내가 주문한 메뉴. 쇼케이스 안의 빵들도 모두 맛있어 보인다.



런던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여지없이 행복하게 저물어간다. 언제 어디서나 늘 친절한 런더너들 덕분에 나홀로 여행이 고되지 않고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런던의 이러한 다정한 분위기에 가랑비도 아닌 장대비를 맞은 것처럼 흠-뻑 스며들고 있었다.


밤 거리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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