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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Jan 27. 2024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고 했던가.

L. V. Beethoven | Piano Concerto No.4



그저 아름답기만 한, 한없이 듣기 좋은 음악을 넘어, 듣는 이로 하여금 내면의 어떠한 심연과도 같은 지점으로 침잠할 기회를 제공하는, 그토록 서정적이고 감미로우면서도 심오하고 철학적인 음악을 수도 없이 써냈던, 그야말로 ‘천재 음악가’라는 수식어가 전혀 과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그, 베토벤. 그는 어쩌면 이름조차도 이토록 멋진가. 그 글자는 미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짜임새 있고 안정적인 데다가 그를 발음할 때 귀에 들리는 소리 또한 내겐 퍽 멋지게 느껴진다. 이름까지 예술적이었던 사람 베토벤은 오래도록 널리 사랑받을 다섯 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세상에 내놓아, 나를 포함한 21세기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영감을 불어넣고 귀를 감미롭게 적셔주며 가슴에 감동의 추를 던져주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그의 멋진 피아노협주곡 다섯 곡을 앉은자리에서 차례대로 모두 들어보며 변화하는 드라마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분명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만큼 마음을 굳게 먹지 않고서는 모두 합하여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그 곡들을 한꺼번에 음미하기란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일은 듣는 이에게도, 연주하는 이에게도 모두 도전과 같지 않을까. 물론 성공한다면 그 수고에 걸맞은 영적 결실을 얻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선뜻 도전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보낸 오랜 나날을 정리할 기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올랐다. 바로 박재홍 피아니스트의 <콘체르토 마라톤 프로젝트_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공연이었던 것이다. 박재홍 피아니스트는 나의 이전 글들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매우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연주자로, 부조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거두고 작년에는 벽산예술상 음악상까지 수상한 이력이 있다. 이 피아니스트가 2023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인천시립교향악단(지휘: 이병욱)과 함께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기도하였고, 나를 비롯한 많은 관객들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고자 공연장을 찾았다.


무대와 객석 모두 결의로 가득 찬 것처럼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연주되었다. ‘1번’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나 사실 시기상 2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협주곡에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향기가 여전히 부유하고 있지만 베토벤 고유의 향취 또한 섞여 들어 제법 매력적인 구성을 내보이고 있다. 박재홍과 인천시립교향악단은 무난하게 이 1번 곡을 연주하고 뒤이어 2번 곡까지 무난하게 마무리하며 1부 연주를 끝마쳤다. 사실 이때 당시 유럽 여행의 여파로 한국에서의 시차 적응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때여서 1부의 연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1부 연주는 내 기억에 그다지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2부에서는 피아노협주곡 3번과 (내가 특히 좋아하는) 4번이 연주되었다. 박재홍 피아니스트의 평상의 연주에는 그의 스승인 김대진 교수의 연주 스타일이 언뜻언뜻 반영된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큰 체구와는 반전의 성격을 띠는 섬세함, 그리고 꽤 서정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번은 협주곡인만큼 피아노 연주에 있어 지휘자의 철학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색깔과의 타협 및 조율이 수반되기에 그의 색깔이 오롯이 드러나는 연주는 아니었지만 그의 연주 매력이 충분히 느껴짐과 동시에 곡의 서정성이 살아있는 연주였다고 생각했다. 5번 협주곡을 위해 페이스를 조절한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2부에도 나는 어김없이 시차적응과의 싸움으로 분투하기는 하였으나 내가 각별히 좋아하는 4번 곡이 연주될 때만큼은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그 선율에 황홀히 녹아들었다. 만약 연주가 내 취향과 어긋났다면 황홀경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테지.


드디어 이 잔치의 폐막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대망의 3부 무대가 열렸다. 1악장 서주부부터 황홀하고 짜릿하게 도파민을 자극하는 피아노협주곡 5번이 힘차게 연주장 안에 울려 퍼지며 관객들의 사기를 한껏 북돋웠다. 그 에너지에 고무된 듯, 관객들도 3시간을 달려왔다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활기찬 모습으로 그 연주에 일제히 몰입하였다. 나 역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이 황홀한 곡에 초집중하였다. 마지막 5번 곡에서는 피아니스트의 연주 매력도 한결 잘 살아났고 오케스트라의 합도 좋았기에 그야말로 이 프로젝트의 유종의 미를 거둔 연주였다고 할 수 있겠다. 곡이 다 끝난 후에 연주자와 관객 모두가 전투를 막 끝낸 병사들처럼 전우애와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분위기가 일순 감돌았는데 그 순간의 느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면서 안도감이 들고 아쉽기까지 한, 복합적인 감정의 타래가 머릿속에서 얼키설키 마구 굴러다녔다.


안 그래도 피로한 처지에 장장 네 시간(인터미션 포함) 가까이 혼신을 다하여 음악에 집중하고 나오니 더 이상 한 톨의 넋도 남지 아니하고 모두 빠져나가 버린 껍데기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책을 읽겠다고(겸사겸사 스낵을 먹기 위해서) 인근 카페에 가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난 후 귀가할 때는 정말이지 직립보행을 하고 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연주 감상에 열심히 몰입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이번 연주는 베토벤의 음악 세계관 변천사를 단방에 훑어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선물했다. 더군다나 앞으로의 무한한 성장과 성숙을 기대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는 연주자가 이러한 기회의 장을 제공하였으니 그 시간이 헛되지 않고 알차게 잘 채워진 것 같다.


문득 화가 르누아르*가 남겼다는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지. 뒤이어질 아름다운 무언가를 남기며. 베토벤처럼.




*르누아르(본명 : Pierre-Auguste Renoir) :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 Massimo Zanetti)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의 유튜브 영상 링크를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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