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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품은 여름의 온기.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

G. Puccini | La Fanciulla del West

by Daria



푸치니 서거 100주년 기념해여서 그런지 올해에는 조금 더 다양한 푸치니 오페라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난 주말에 공연한 <서부의 아가씨>인데, 푸치니의 여러 작품들 중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작품이라 대한민국, 오페라가 대중적으로 주목받지 않는 이곳에서 공연되는 것이 새삼 신기하며 반갑기까지 하다. 나 또한 <서부의 아가씨>는 실연과 영상물 모두 통틀어서 이번이 첫 감상인 작품이다. 인생 첫 <서부의 아가씨>인 만큼 ‘첫 감상’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일부러 예습도 일절 하지 않았다. 2024년, 작곡가 푸치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내 기분은 마치 1910년도로 돌아가 <서부의 아가씨> 초연을 감상하러 가는 길과 같이 느껴졌다.


이탈리아인 푸치니가 미국에서 연극 <황금시대 서부의 아가씨>를 관람한 후 이에 영감을 받아 작곡에 착수했다는 이 오페라는 제목 그대로 19세기 미국 탄광촌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홀로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온 외로운 이들에게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여성 캐릭터 ‘미니(Minnie)’는 기존 푸치니 오페라 속 여성 캐릭터들과는 사뭇 다른 씩씩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웬일로 끝까지 죽지도 않고 살아남아 스스로 사랑을 쟁취한다. 음악으로 보나, 줄거리로 보나 확실히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예술계의 변화 흐름이 이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게다가 무대와 함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오페라보다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매 장면마다 대표될 만한 아리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특성도 이에 한몫하고, 장면에 맞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극적이고도 세련된 관현악 또한 단단히 한몫하는 듯하다. 첫 감상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제법 신선하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극 중 미니존슨(라메레즈)은 서로에게 반한 이후로 이러저러한 천신만고를 겪는 동안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으며 결국 함께 마을을 떠나고야 만다. 둘이 어쩌다 저렇게까지 사랑에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험도 무릅쓰며 지켜내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조금 부러웠다. 새삼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라는 밈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래서… 그거 얼마나 멋진 건데? 너희만 알지 말고 시원하게 좀 공유해 봐.”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서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 시간이나 있었을까 싶은 이 연인이 부디 행복한 여생을 보냈기를 바라본다. 그들은 어쩌면 타지에서의 혈혈단신 생활, 혹은 불안정한 떠돌이 도적 생활에서 기인한 외로움으로 인해 지금 당장 번쩍 떠오르는 감정을 숭고한 사랑인 것처럼 착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일상에 권태를 느낄 때쯤 때맞춰 일상에서 도피할 좋은 소재가 사랑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을 쓰고 나타났을 수도 있는 일이고.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봐야 하는데 자꾸만 현실적인 걱정이 튀어나온다.^^;;)


내가 관람한 회차에는 미니 역에 소프라노 임세경, 딕 존슨(라메레즈) 역에 테너 박성규, 잭 랜스 역에 바리톤 양준모가 캐스팅되어 무대 위에서 우수한 기량을 뽐냈다. 1막은 여러모로 전개도 음악도 다소 어수선하여 몰입하기에 쉽지 않았으나 2막이 시작되고 나선 이야기도 급 흥미로워지고 가수들의 목도 비로소 풀린 듯했다. 그 이후로 이어진 가수들의 노래도 쭉 좋았고, 눈 내리는 겨울 숲 속의 정취를 한껏 살린 무대 연출 또한 이 극 그리고 이 계절과 잘 어울리니 참 좋았다. 이국 땅에서 만난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의형제들과 서로 의지하며 제 인생의 혹한기를 나름대로 살아내고 있는 그들의 삶이 시공간적 배경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나는 것 같았다.


오페라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제법 갈리는 작품들 중 하나인 <서부의 아가씨>를 처음으로 관람한 나의 감상은 결과적으로 ‘호(好)’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에) 1막이 조금 지루했는데 전개상 필요한 주요 장면들이 있어 아주 외면해 버리기는 또 어려운 막인 것 같다. 작곡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개작될 일은 없을 테고… 유능한 무대 연출가들의 세심한 연출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겠다. 조금 지루했던 1막을 제외하고 2막과 3막은 재미있었으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리아는 없더라도 서곡을 비롯하여 극 전체를 아우르는 음악의 톤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또한 이민자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 이야기도 좋았고, 요즘에야 이 같은 캐릭터에 하등 특별함이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꽤 참신하고 인상 깊은 캐릭터였을 극 중 ‘미니’의 서사도 좋았다. 공연 당일 날씨도 너무 추웠고 몸 상태 역시 좋지 않은 데다가 정세까지 뒤숭숭하여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갈까 말까 숱하게 망설였던 공연이었는데 다녀오니 보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대단히 재미있고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호연이기도 했고, 이전에 본 적 없는 작품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특히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를 보고 난 후 주저리주저리 써 내려간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시점에 문득 떠오른 문장 하나를 덧붙여 본다. 20세기의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출처가 100% 분명하지는 않다.

In the depth of winter, I finally learned that within me there lay an invincible summer.
- Albert Camus



커튼콜 때 찍은 미니, 딕존슨, 잭랜슨의 모습.





Puccini <La Fanciulla del West> 2013 Live_Youtube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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