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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2024 <투란도트>

by Daria



지난달 본 매거진에 KSPO Dome에서 진행됐던 오페라 <투란도트>에 대한 후기를 게재했었는데 약 한 달 만에 또 다른 <투란도트> 공연 후기를 작성하게 됐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푸치니, 그리고 그의 유작 <투란도트>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은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으니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고 바로 공연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https://brunch.co.kr/@myhugday/91

(**이전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의 <투란도트> 글 링크)



이전 KSPO Dome(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의 <투란도트> 공연에 대해 실망스러운 경험을 하고 난 직후, 두 달 뒤 있을 COEX(코엑스)에서의 <투란도트> 공연을 예정대로 보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지 잠시나마 꽤 깊은 고민을 한 바 있었으나 투란도트를 좋아하는 나는 결국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연이은 두 경험을 통해 늘 오페라 공연을 올려왔던 공연장들(이를테면 오페라하우스 또는 세종문화회관 등)이 아닌, 이례적인 초대형 콘서트장에서 진행하는 특별기획 오페라들은 차후 거르는 것이 이롭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슷한 콘셉트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됐던 이 두 공연 모두 출연진들의 퍼포먼스 실력이 좋아 오로지 무대 위의 공연만 놓고 보자면 매우 만족스러웠다. 특히 이전 KSPO <투란도트>는 세트장이 정말 화려하고 정교했던 점, 이번 코엑스 <투란도트>는 가수들 및 무용수들의 실력이 매우 빼어났던 점이 비록 운영상의 큰 하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2월의 추운 겨울 저녁, <어게인 2024 투란도트>가 막을 올리는 첫날, 나는 오랜만에 코엑스에 방문했다. 공연 시작 약 30분 전쯤 도착하면 적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당도한 그곳엔 수많은 인파, 그리고 수없이 나뉘어 뒤섞인 여러 갈래의 대기줄로 아수라장이었다. 발권 부스 위치를 안내하는 제대로 된 팻말도 없이 천을 덮은 탁자에 예매처를 적은 A4용지가 붙어 있었고 그 마저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너덜너덜 걸레짝과 같은 상태였다. 심지어 인파로 인해 그 걸레짝마저도 제대로 식별하기 힘들었다. 무려 100만 원에 달한 VIP석 입장구 역시 ‘VIP 입장’이라는 글자를 인쇄한 흰 A4용지만이 초라하게 붙어있었고, 포토존이랍시고 세워놓은 현수막은 그럴싸한 조명 하나 없이 천도 제대로 안 씌워져 가장자리는 온통 우글우글 운 채로 티켓 부스 옆에 뻘쭘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난 VIP 예매자도 아니고 기념사진을 찍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저 지나가며 바라본 광경만으로도 어안이 벙벙했다.


포토존과 VIP석 입구



더욱 심각한 문제는, 주최 측에서 관객에게 사전 고지도 없이 임의로 좌석 배치를 변경하는 바람에 수많은 관객들이 본래 예매한 곳과 다른 위치에서 관람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공연 티켓을 이중으로 수령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1차로 본래 티켓을 수령하고 다시 2차로 변경 티켓을 수령하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티켓 수령 대기시간이 두 배 이상 늘어났고 당연히 공연은 제시간에 시작할 수 없었으며 이에 뿔난 관객들은 이곳저곳에서 불만을 토로하며 종국에는 고성까지 오고 가는 참극이 벌어졌다. 나는 이미 KSPO Dome에서 형편없는 운영 실태를 경험하여 이런 황당한 일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기도 했고, 어떻게든 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자는 생각을 내심 품고 있었으며, 기다리는 동안 읽고 있던 소설책의 내용에 흠뻑 빠져 여념이 없었으니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침착하게 사태를 관망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요 코미디가 따로 없는 진풍경이었다. 학생들의 학예회도 아니고 야심 차게 기획하며 티켓까지 초고가에 판매한 큰 규모의 전문 공연인데 이런 운영이라니… 흡사 어릴 때 보던 텔레비전 시트콤을 떠올리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약 20분 정도 늦게 공연의 막이 올랐다. 막이 걷힌 무대의 규모 자체는 정말 컸는데 실제 조형물이 아닌 LED 전광판 배경으로 무대를 꾸며놓아 휘황찬란하기는 하나 어쩐지 군색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소규모 극장에서 하는 공연들도 나름 이런저런 소품들로 무대를 꾸미는데 이건 조금 무성의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막 합창은 꼭 음원을 튼 것처럼 선명하고 깔끔했으며 푸틴파오의 춤은 눈길을 사로잡는 충분한 볼거리였다.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시녀들의 군무도 좋았고, 수수께끼 도전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며 주고받는 칼라프와 주변 인물들의 아리아도 정말 좋았다. “주인님 들어주세요.”를 부르는 류(Sop. Juliana Grigoryan)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아름다워 마치 천사 같았다. 칼라프가 실제 징이 아니라 스크린 속 가짜 징을 치는 부분에서 홀딱 깨긴 했지만 1막의 춤이나 노래들이 매우 좋아서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투란도트의 3막을 좋아하겠지만 나는 2막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 2막에서 투란도트의 본격적인 고음 대잔치가 벌어진다. 핑, 퐁, 팡, 세 대신들의 삼중창도 바로 이 2막에 있다. 난 이 핑퐁팡 삼중창을 딱히 더 좋아하진 않지만 이 장면을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삼중창 후 2막의 메인인 수수께끼 대결이 펼쳐지는데 투란도트(Sop. Maria Guleghina)의 시원하고 안정적으로 쭉쭉 뽑히는 고성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설치해 놓은 스피커 음질(혹은 마이크의 품질)이 형편없다 못해 최악이어서 소프라노의 강한 노랫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거칠게 찢어지어 잡음과 함께 출력되었다. 이 음향 문제는 인터미션 동안 보완하여 3막에선 개선되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전혀, 눈곱만큼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한 음향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가수들의 노래 실력은 나로 하여금 환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앞선 모든 문제들을 잊어버리게 만들 만큼 좋은 퍼포먼스였다.


드디어 투란도트의 메인 아리아라고 할 수 있는 “아무도 잠들지 말라” 그리고 “얼음으로 뒤덮인 그대여”가 등장하는 3막이 이어졌다. 칼라프가 부르는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는 고난도의 노래임이 분명하나 무대 위의 가수가 긴장한 기색을 너무 역력히 드러내면 그를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덩달아 불안하게 되고 몰입도 깨진다. 이 공연에서 칼라프 역을 맡은 테너 Yusif Eyvazov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얼굴 위에 선명하게 띄운 채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 아리아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무사히(?) 넘기고는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열창한 가수에게 몹시 미안하게도 내게 있어 그 음색은 다소 날카롭고 투박했으며 음처리도 비교적 덜 매끄럽게 느껴졌다. 칼라프가 “Vincero~!”를 외치자마자 객석에서는 한바탕 환호가 일었는데 조금 어리둥절했다. 음이탈 없이 무사히 노래를 소화한 것은 훌륭하지만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라는 모 대중가요의 가사가 생각나는 노래였달까. (1, 2막에서의 칼라프는 참 좋았는데… 3막이 너무 아쉬웠네요.. 좋지 않은 소감을 이야기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에이바조프…) 아무튼 뒤이어 류가 칼라프에 대한 순애를 드러내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리아를 부르고 자결해 버리는데 이 장면은 언제 봐도 마음이 아프다. 자신을 봐주지도 않는 그 남자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목숨까지 내놓는지… 그가 보여준 따뜻한 눈빛 한 번이 그녀에게 그렇게나 강력했다면 도대체 그녀는 얼마나 차가운 삶을 살아왔던 것인지…. 물론 그녀의 이 사랑에는 연정뿐만 아니라 충성심까지 함께 포함된 것이겠지만 말이다. 류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 때문에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 것 같다. 류의 자결 후 이어지는 내용은 개인적으로 다소 ‘얼렁뚱땅~’ 전개처럼 느껴져 보통 이때부터 대개 집중력이 흐려지곤 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멍 때리다 보니 3막도 모두 끝이 났다. 앙코르는 없었고 커튼콜도 비교적 짧게 마무리되었다.




여러 측면에서 허점이 많았던 이번 공연. 하지만 무대 위 출연진들의 실력은 출중했고, 그 덕분에 나쁜 기억은 가볍게 치워 버리고 좋은 감상만 안고 귀가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글을 쓰느라 나쁜 기억을 열심히 소환해 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좋았던 기억도 다시금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나라 오페라 산업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수준 높은 오페라 공연 감상의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커튼콜. 순서대로 푸틴파오, 핑퐁팡, 알톰.
커튼콜. 순서대로 티무르, 류, 칼라프.
커튼콜. 투란도트와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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