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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 몸 Sep 07. 2019

[전문] 7화. 장애 여성의 연애에 대하여 (배복주)

"몸을 써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지만 하지 못한다. 친구들과 나란히 걷고 싶지만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내가 왜 느리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변명을 지어내곤 한다. 마치 그들이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친구들이 모르는 척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놀이공원에 가자 거나 오르막길을 걸어 운동경기장에 가자 거나 산 정상에 올라가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자 제안한다. 내 몸은 우리다. 스스로가 만든 감옥이다. 지금도 여기에서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이 안에서 나갈 방법을 알아내려고 나도 노력을 하고 있다." (록산 게이의 '헝거' 중에서) 

"안녕하세요. 저는 '장애여성공감'에서 활동하는 배복주라고 합니다. 저는 '장애여성공감'에서 1998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어요. 장애가 있는 성폭력 피해 여성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주로 했고요.

저도 사실 장애가 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하고 속도가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걷는 속도도 다르고, 그리고 공간에서 제가 일어나거나 서거나 할 때 그 공간을 차지하는 부분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크고. 또 사실 록산 게이도 책에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저도 몸이 상당히 살찐 편이거든요. 

제가 장애도 있고, 또 살도 쪘고 이렇기 때문에 사실 이동이나 공간이나 몸을 타인과 교감할 때 그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 계속 만드는 변명이 많이 있죠. 내 몸이 그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혹은 불편해할까 봐. 스스로 그들에게 마음 편한 변명을 내가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이 있죠. 

그들이 즐기는 문화에 접근할 수 없는 나, 그래서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아임오케이'라는 변명을 하면서 그 그룹 안에 속해지고 싶은 욕구, 이런 것들이 어린 시절에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장애여성공감'이 1998년도에 창립을 했어요. 그래서 20년 동안 활동을 했고 올해 20년이 됐는데요. '장애 여성의 삶이 뭐야?' 이런 질문을 많이 해요. 그래서 장애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10분이 가지는 경험을 이야기책으로 만들었고요. 

'이상한 몸'으로 규정되는 기준들이 있잖아요. 우리 사회에. 그런데 이상한 몸이 어떻게 보면 이상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상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어쩌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이상한 몸'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책(제목)을 지어봤어요.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 있어요. 책을 다 끝내고 나면 '아, 우리 사회에 다양한 몸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어쩌면 이상하지 않은 몸'이라고 마지막(장)을 접을 때는 그렇게 접히길 바라는 마음이고요. 

이 책에서 제가 쓴 부분은 몸에 대한 부분인데요. 제가 장애가 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외모적인 콤플렉스라든지... 특히나 제가 가슴이 상당히 큰 편이라서 힘들었던 시간들이 좀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책에서 제목도 '부푼 가슴으로 비틀거리기'라고 소제목을 달았는데, 장애가 있지만 조금 가슴이 작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맞는 브래지어가 없었거든요. 80A 80B가 보통 한국 여성들의 가슴 브래지어 사이즈라서 온통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는 반도 안 차거든요. 제가 브래지어를 구입하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어요. 

스포츠 브라, 예를 들어 어릴 때 가슴이 커졌을 때, 처음에는 이게 너무 부끄러워서 압박붕대로 칭칭 감고 다녔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거대하게 크다는 걸 제. 가 인식했거든요 그래서 압박 붕대를 엄청 많이 꽉 해서(조여서) 가슴을 안 보이게 하면서 다녔던 기억이 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브래지어를 착용을 아이들도 하니까 저도 해야겠다고 했는데 브래지어가 사실 저에게 맞는 게 없어서 굉장히 고생을 했어요. 왜냐면 저는 장애가 있으니까 속옷 가게 같은 곳을 막 돌아다니면서 저에게 맞는 브래지어를 찾는 노력을 하기가 또 너무 힘든 거예요. 

가슴 큰 분들은 어디 가면 그런 F컵이 있다고 거기 가서 구입해보라고 하시는데 '거길 어떻게 가지?' 저에게는 그 접근성이 또 하나의 난관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실 되게 인터넷을 통해서 정말 많이 구입을 했어요. 제일 큰 D컵 F컵을 구입해서 착용을 했는데 어떤 브래지어는 딱 맞긴 한데 온통 내 몸 상체가 가슴으로만 점철된 느낌이 있어서. 아, 나는 지금도 사실 그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 큰 가슴을. 

외국에 가보니까 다 드러내놓고 다니시던데 왜 저는 그게 잘 안 되는지. 저는 제일 자유로운 건 브래지어를 안 하고 집에 있을 때예요. 제일 좋거든요. 그런 상태로 길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이런 상상을 좀 많이 하는데요. 저에게 브래지어는 약간 의료기구다, 안 차고 다니는 게 자유로운데 안 차고 다니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어깨가 너무 아파요. 어깨가 너무 아파서 통증이 와요. 허리도 아프고. 왜냐하면 받쳐주지 않으니까 어깨가 처지는 거죠. 처지다 보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브래지어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제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서, 약간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브레지어를 착용을 할 수밖에 없고. 참 복잡합니다. 이 세상살이가 이게 쉽지가 않아요. 

가슴을 조이고 괴롭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성운동에서 브래지어를 벗으면서 여성 몸의 해방을 이야기하거든요. 저는 저의 몸의 건강을 위해서 착용을 해야 하고요. 그런 두 가지 상황이 저를 항상 갈등하게 하는 거죠. 그런데 의료기구라고 하니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럴 수 있겠구나.' 예, 그럴 수 있답니다. 

가슴이 큰 분들은 해방감도 있지만 건강에 문제도 있어요. 사실 브래지어를 하나 딱 놓고 '아 이건 내게 어떤 의미일까' '이걸 착용하는 것이 나의 건강의 문제일까. 아니면 억압의 코르셋일까' 이런 두 가지 생각을 해요. 지금도 여전히 저는 장애에 대한 것보다 가슴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던 시절도 많이 있었어요. 3살 때 장애를 입었기 때문에 저는 비장애인인 내 몸을 한 번도 기억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걸 아는 사람은 저희 엄마밖에 없거든요. 

한 살 때부터 세 살 때까지 장애가 없었으니까 그때 엄마가 제가 똑바로 걸었다고도 이야기하고 뛰어다녔다고도 이야기해요. 그런 기억은 저의 머릿속에는 전혀 없거든요. 늘 다리를 비틀거리면서 걷는 것이 굉장히 저에게는 익숙한 일이고 그래서 일어나는 방법, 서 있을 때 조금 덜 힘든 방법, 제가 사실 한쪽 다리가 힘이 있고 한쪽 다리가 힘이 없는데 힘이 없는 한쪽 다리는 되게 정상적으로 생겼어요. 소위 말하는 비장애인처럼 생겼는데, 다리가 힘이 있는 다리는 휘어져 있어서 '이렇게' 휘어서 걷거든요. 그런데 서 있을 때는 가끔 한쪽 다리가 너무 힘들잖아요. 서 있을 때. 그러면 한 10초 정도 20초 정도 힘이 없는 다리가 힘을 내보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 쉬게 해주기도 하고. 저 나름대로 밸런스를 익혀왔죠. 저는 그게 되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런 걸 모를 거 아니에요? (저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배워 왔거든요. 장애로 인해서 내가 어떤 불편함이 있고 어떻게 위험에 대처해야 하는지는 사실 내 몸이 되게 훈련돼있어서 익숙한데 가슴 문제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과제에요. 사실 더 고민에 쌓여 긴 시간 가슴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가슴축소수술을 고민을 했고, 다리를 수술할까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큰 가슴을 수술해볼까 하는 생각은 진지하게 했어요. 그만큼 어린 시절에 다리에 장애를 입어서 살아온 내 몸의 익숙함이 있는데 초등학교부터 커진 내 가슴은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여전히, 지금도 사실 '수술을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몸의 일부인 것 같아요. 

연애는 제가 되게 많은 사람과 했지만 특히 비장애 남성과 연애하면서 성적으로 무성화되는 경험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걸 쓰고 싶었어요. 기본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간에 남성과 여성은 연애 관계에서 자원의 구성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여성 같은 경우에는 몸이 자원인 경우가 많고 남성 같은 경우에는 능력, 그 사람의 사회적 능력이 연애할 때는 되게 중요하게 미치는 요소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장애가 있는 여성인 저의 몸은 하자가 있는 몸이죠. 하자가 있는 몸이고 도저히 남성에게 채택될 수 있는 몸은 아닌 거죠. 그래서 어떻게 비장애 남성과 연애를 하기 위해서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인가. 저 같은 경우에는 '착한 여자' 그리고 '순종적인 여자' 되게 '여성성을 극대화시키는' 1990년대입니다. 여러분. (웃음) 

1990년대에 비장애 남성과 연애할 때 가장 연애 전략으로서 잘 통했던 건 몸은 하자가 있지만 착한 여자, 몸은 하자가 있지만 순종적인 여자, 몸은 하자가 있지만 나름 얼굴이 좀 순하게 생겼다든가 청순하게 생겼다든가, 이런 식이었어요. 뭔가 다른 전략을 가졌죠. 그래서 사실 비장애 남성들이 장애 여성을 택할 때 그런 면을 되게 좋아하는 남성들이 오겠죠. 그러니까 뭔가 자기에게 순종하고 착하고. 저도 그런 케이스였어요. 

그래서 비장애 남성과 연애를 할 때 화가 나기도 했어요. 저도 굉장히 동등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데, 그걸 계속 참아내는 게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 남성이 가지는 가부장성, 폭력성, 일방적인 요구들, 이런 것에 제가 끊임없이 맞추어 나감으로써 내 스스로가 '아,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굉장히 가학적인 연애를 했던 것 같고. 그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를 꼭 잡아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장애가 있기 때문에 가족을 구성했을 때 둘 다 장애가 있는 것보다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그 가족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남성이 장애가 없는 남성일 때 내가 구성하는 가족이 굉장히 정상적으로 보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절대로 장애 남성이랑 결혼할 일은 없고 비장애 남성이랑 결혼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그 사람의 일방적이고 통제적인 어떤 연애를 내가 감당해야 하고, 그 연애의 완성은 집에 장애가 있는 여성이지만 비장애 남성이 대표하는 정상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욕구가 상당히 있었고요. 그래서 꿈꾸죠. 나는 다리를 절어서 잘 못 걷지만, 내가 힘들 때 나를 두 팔로 번쩍 안고 걸어가는 남자, 업어주는 남자, 아이가 있을 때도 내가 업고 갈 수 없지만 그 남성이 업어줄 수 있고 뛰어놀 수 있고 아이에게도 정상 가족 이미지를 줄 수 있고. 

이런 생각을 꿈꾸면서 연애를 했고 그래서 그 남자와 관계가 되게 잘 됐죠. 제가 많이 참고 제가 많이 노력했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연애를 했지만 그래서 결혼이라는 말이 그 남자 입에서 나왔을 때 행복했고요. 결혼을 하려고 그 남자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 제가 다 깨진 거죠. 

저는 비장애 남성이 대표하는 가부장제 질서에 맞는 4인 가족의 정상성을 꿈꿨는데 그 남자의 어머니라는 분이 '꿈 깨라'는 말을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네가 아이는 낳을 수 있냐, 네가 내 아들의 밥을 차려줄 수 있냐, 네가 내 아들의 빨래는 해줄 수 있냐, 네가 내 아들의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냐, 네가 뭘 할 수 있냐, 병신의 몸으로.' 이렇게 딱 말씀하셨어요. 

그랬을 때 제가 아, 자각을 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이 연애는 나에게 되게 불리했고 일방적으로 내 스스로를 누르면서 했던 연애구나. 그래서 많이 울면서 여러분들도 연애하시면서 많이 우셨겠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제가 먼저 제안했던 것 같아요. 

이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너와의 연애는 끝이다, 라고 선언을 제안을 해서 헤어진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넌 나쁜 놈이고, 너와는 끝이야, 난 너의 노예가 아니야, 나는 병신이 아니야, 나는 나야, 라면서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페미니즘 공부도 하지 않았고 굉장히 순종적이고 착한 애였는데 그때 그렇게 선언을 하고 헤어지고 난 다음에 '아 정말 행복하다' '속이 시원하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결혼은 없어, 이제 끝이야' 이렇게 선언하고 난 다음에 나는 결심을 하고 좀 다른 생각을 갖는 곳을 자꾸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그 연애를 계기로. 

다만 저는 제가 장애 여성이라는 한 가지 정체성으로만 계속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요. 저는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것은 장애로 인한 차별이고, 이것은 여성이라서 받은 차별이고,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하는 것보다는 '나 배복주'라는 개인의 어떤 삶 자체인 것이지 나를 그냥 장애가 있고 여성이고 이래서 두 가지 차별로만 계속 구성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하거든요. 지방 대학을 나왔고, 그리고 저는 법률혼으로 남성과 혼인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성애자일 거야, 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질병이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지역에서 태어나서 지방 사람이었고 그리고 나는 가정폭력의 피해 경험이 있는 사람이고.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정체성은 장애와 여성이라는 정체성 말고도 너무 다양한 경험으로 인해 정체화된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걸 굉장히 복합적이고 교차적으로 고민을 하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운동은 한 가지의 이슈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적인 구조와 맞닿아있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과 연결이 돼 있고 그 경험과 아주 밀접하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장애 여성 운동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장애와 여성의 문제로만 정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 아까 나열했던 많은 제 삶의 경험에서 제가 정체화된 부분들이 다 우리 사회에서는 평등해져야 하는 문제이고 회복돼야 하는 문제이고 포용 돼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분리되고 차별하고 때로는 혐오하는 그런 세상과 맞서는 일이 되게 중요한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를 내는 과정이 바로 운동하는 과정이고 활동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거든요. 왜 장애 여성 운동가로서 살겠다고 결심을 했냐면 나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내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 이 문제가 해방되게 하기 위해서 운동을 하고 있고 공부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러는 거거든요. 그런데 나만의 문제인가. 그건 아니지. 많은 사람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건데, 조금도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렌즈는 뭘까. 고민해서 선도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자세가 좀 필요하지 않나. 책 '어쩌면 이상한 몸' 여러분 많이 읽어주시고 많은 피드백도 주시면 제가 제 몸과 또 말을 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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