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종족'에 관한 보고서
얼마 전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나의 해방일지, 2022>가 '내향인 종족'을 사회 전면에 부각시킨 드라마였다면, <사랑의 이해>는 우리에게 세상엔 또 다른 종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지방화, 개별화된 집단의 인식과 가치 추구는 포스트모더니즘 - 이제는 '포스트'라는 표현이 무색하겠지만 - 덕분에 가능한 사회 문화 현상 같기도 하다. 여하튼 다시 드라마로 돌아와서, <사랑의 이해>의 주된 내러티브는 이성 간의 주저함에 대한 이야기이자,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소한 오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소한 오해들을 덮어두고 사는 종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이 드라마도 계급의 문제를 이성관계의 전면에 내세웠고 그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이 드라마의 비평글에 언급되곤 하지만, 사실 이전의 많은 다른 드라마들도 계급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금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통상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성 간의 관계를 다룰 때 불문율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사건의 기승전결, 특히 둘 간의 오해를 다루는 방식이라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야기를 아무리 복잡하게 꼬아도 이성 간의 갈등은 종국엔 해결되어야 할 문제고 오해는 풀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진심은 상대방에게 닿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든 배신이든 금전적 이해관계에 머무르건 간에, 사건의 인과관계는 해결되어야 할 대상이지 그냥 반복적으로 간과되거나 미해결로 축적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종국에는 그 축적된 미결의 오해들을 풀겠다는 여주나 남주의 결심(선택)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야 한다. 설령 두 사람이 헤어지거나 미해결 관계로 남더라도 드라마의 화자는 제삼자를 통해, 혹은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혹은 과거 회상이나 상상을 통해 시청자에게 그 인과 관계를 서술해주어야만 한다.
반면 <사랑의 이해>를 보다 보면 진심이 전달되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 부분 그냥 상황이 흘러가버리곤 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행위들과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일례로 남주는 끝까지 녹음된 음성파일을 듣지 않고 지우고, 여주는 상대가 왜 그랬냐고 물으면 종종 깊은 생각 없이 '그냥요'라고 답하곤 한다. 설령 진지한 상황에서조차 진심을 담은 말을 주고받아도 그 말이 가슴 뭉클하거나 '아, 그래서 그랬구나' 싶은 대사들은 아니다. 드라마는 빈번하게 사소한 오해들이 그다음에 엇갈리는 행동으로 나아가고, 어느 시점에는 절절한 상태로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종국에 그 오해들은 해결되지도 않고 둘 간의 관계가 절절한 만큼 서로의 진심을 관통하지도 않는다.
이로 인해 남주와 여주를 바라보는 우리는 멘붕에 빠지거나 '고구마 100개 먹은' 상태가 되었다. 물론 몇 가지의 빌미와 배경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주가 바닷가에서 열심히 만든 모래성이 결국엔 무너질까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렸다는 고백에서, 시청자들은 어느 정도의 그런 종족에게 공감을 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하고 답답해하고 해피엔딩이 아닌 둘의 관계를 마치 본인들의 일인 양 내심 찜찜해한다.
따라서 글의 처음에 이 드라마(의 인물)를 두고 '사소한 오해들을 덮어두고 사는 종족'이라고 명명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이들은 이런 일상을 문제시하거나 발생한 갈등을 해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론 '사소한 오해들을 덮어두고 사는' 종족(이하 사오덮사 종족)이 이런 성향을 갖게 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했던 과거(나 현재), 애정 결핍이라거나 어릴 적 관계에서의 남다른 트라우마 등등.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이유들 없이도 그저 그런 성향의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세상에는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오해를 덮어두고 사는' 일을 큰 불편함을 느끼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나름 잘 소화하며 지낸다는 사실이다. 보통 사람들이 이 종족과 엮이면 문제가 생긴다. 갈등 상황이나 오해가 쌓였을 때 매번 답답해하기도 하고 더군다나 그게 절절한 이성관계라면 상대에게 화를 내는 정도로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급발진하거나, 원치 않게 단기간 '스토커'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사오덮사' 종족들은 그런 류의 사건들로 인해 퇴색되는 현실에 민감한 종족이다. 현실의 벽을 넘으려고 노력하거나 현실에 적응하는 이들이 다수인 세상에서, 보통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자신이 겪은 오해들 속에서 불안한 현실을 명민하게 감지하는 것이다. 오해가 생기면 억울해하며 곧장 풀려고 애쓰고, 오해가 풀리면 이내 안심하려는 정상적인 마음보다는 오히려 너무나도 빈번하고 더 사실에 가깝게 도달하는 것 같은 오해의 '축적'을 통해 '이상의 훼손'을, 그 지난한 현실로의 '하강'을 경험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심파괴의 마음, 천천히 오염되어 멸망의 길을 걷는 지구를 대하는 회의론자의 마음처럼 말이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 이러한 상습적 오해는 너무나도 빈번하다. 상사가 갑자기 나에게 웃으면서 참 성실하게 일하는 게 매번 고맙다고 말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진급자들 대상에서 나만 누락되었던 경험이라거나, 혹은 유년시절 아빠가 갑자기 조만간 꼭 놀이공원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해서 기대감을 품고 깨어난 아침에 외국으로 일하러 떠난 사실을 알게 되는 자잘한 기억들 말이다.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돌아서고 원치 않던 무심한 이들에게 고백을 듣는다. 우리는 일상적으로도 오해라고 생각하는 많은 자잘한 사건들 속에서 인과성 없는 공격을 참 많이도 반복해서 받는다.
그렇기에 '사오덮사 종족'은 순간의 진정성을 사랑한다. 타자 '그 자체'가 아닌 타자가 나에게 진심으로 던진 어느 시점의 말들, 어느 장소에서의 포옹을, 어느 조직에서 나를 편들어준 행동을, 사랑한다. 이들은 추호의 의심 없는 찰나, 그렇기에 오해가 일절 침범할 수 없는 그런 '박제된 찰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이해> 드라마 속에서도 사진과 그림, 그리고 "그때 그랬다"는 묘사적인 말들이, 그런 찰나적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찰나의 기억들이 내 안에 각인되어 있는 한, 그 외의 모든 것(오해, 공격, 현실)들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와 잘 될 것 같은 미래도 현실이 되면 아름답지 않아 보이고, 실제로도 너무나 빈번하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이 종족들은 탐미주의적이면서 애어른 같은 현자이며, 뼛속 깊숙한 회의론자인 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