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스토리4를 봤다.
토이스토리는 내게 여러 가지로 각별한 영화다. 토이스토리1이 개봉할 당시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고, 입학하고 (좋아하던) 이성과 처음 본 영화이기도 했다. 토이스토리를 떠올리면, 마치 소울 푸드 같은 느낌이 있다. 그날의 후덥지근했던 날씨, 약속 장소에서 삐삐로 연락이 엇갈려 우왕좌왕했던 어설픈 행동들, 뭔가 어두운 극장에 둘이 들어가면서 느꼈던 설렘, 그러나 이내 영화가 너무 재밌어서 그 설렘도 잊어버린 채 해맑게 극장을 나왔던 기억들, 커피집 등 풋풋했던 일련의 데이트 정서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이제는 퇴화된 연애 세포들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CAD 대학원에 들어가서 처음 본 컴퓨터 그래픽스 영상은 존 라세터가 시도한 많은 렌더링 기법들이었는데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토이스토리를 제작한 장본인이고, 토이스토리에 단편으로 나오는 아이가 그의 아이였나, 조카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이의 침 흘리는 행동, 기어가는 모습들을 유심히 보면서 CG로 담아낸 과정은 정말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전공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회의감을 떨쳐내고 행렬과 코딩의 늪에 빠졌다. Damn.
1995년에 1편이 나왔으니 무려 24년이 지났다. 입소문대로 영화는 너무 재밌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왠지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웃고 즐거워하면서도 묘하게 슬프고 우울했다. 아마도 이 기분을 설명하기 위해, 혹은 털어내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된 거 같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 모드) 영화는 매 순간 긴장되고 유머가 있고,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우디의 몇몇 대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못하고 있다.
우디는 앤디가 가장 사랑하는 장난감이었지만, 앤디는 대학생이 되고 이제 부모 집에서도 나왔다. 이제는 다음 어린이인 보니가 우디의 새 주인이지만 보니는 우디를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설명 없이 상황으로 우디가 밀려나고 있음을 보여주다가(보니가 여자아이이고 아끼는 인형도 여자 인형이 되는 부분에서 페미니즘적인 메타포도 읽힌다) 갑자기 보니가 쓰레기 더미에서 찾은 일회용 포크로 만든 새 장난감 포키가 우디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팩폭'을 한다.
"나는 토이가 아니라 쓰레기야, 너도 쓰레기야?"
우디가 앤디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이제 새 주인에게 애쓰지만 주변으로 밀려난 처지가 된 것을 보며, 포키는 말한다. "useless?" 솔직히 말하자면 '쓸모없음'은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다. 우디의 표정이 너무 안쓰럽고 괴롭게 느껴졌다. 우디는 앤디와 너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새 주인이 된 보니와는 그런 추억은 없다. 하지만 새 주인의 토이로서 안쓰러운 충성심을 계속 발휘한다. 마치 원가정의 이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이 어른처럼, 혹은 한때 부모에게 사랑받던, 하지만 이제는 사라져 버린 어떤 정서를 붙잡기 위해 엿같은 상사나 친구, 애인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안쓰러운 기대처럼.
버즈는 우디에게 말한다, 보니는 괜찮을 거라고. 앤디는 자신이 사랑하는 보와 남기를 선택한다. 혹은 이제는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함으로 동격인 토이의 사랑 속에 머물려는 선택을 한다. 우리는 그것이 합리적이면서도 옳은 마음의 소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앤디와의 추억이라는 어떤 아우라를 보니에게서 찾으려는 우디의 결정은, 하나의 자살과 같다. 그 끈을 끊어본 사람만이 그 죽음의 그림자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안다', 그 죽음을 맞아야 '앤비욘드'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 이건 어떤 면에서 명백한 투사다. 이 만화는 두 시간 동안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이슈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 눈 앞에 펼쳐 보였다.
영화 후반에 쿠키 영상들이 계속 올라왔다. 다들 웃었고 나도 웃었다. 우디는 토이라는 설정 때문인지 가끔 동그란 눈이 영혼이 잠시 빠져나간 모습처럼 보였다. 그 눈빛이 계속 남는다.
'우디, 무슨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