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이영-
눈을 떠 보니 나는 다시 병원이었다.
언제 여기에 왔을까? 분명 내 마지막 기억은 요양원에서 바라본 창가였는데… 태풍이 온다고 했던가. 마치 창문을 뜯어낼 것만 같은 바람을 바라보며 날 좀 데려가길 바랐던 기억 이후로 까마득하다. 목이 타서 침대 옆 테이블을 바라보니 네가 늘 닦아 주던 빨대 달린 보라색 물병이 보인다. 그저 물병을 보았을 뿐인데 나는 네가 보고 싶다.
물병에 손을 뻗으려 몸을 기울이니 테이블 끄트머리에 책이 한 권 있었다. 못 보던 책이었다. 물을 마시고 팔을 뻗어 책을 손에 집어 들었다. 단아한 베이지색 옷을 입고 있는 그것은 책이 아니고 노트였다.
맨 앞장은 예쁜 베이지색 무지였다. 손끝으로 쓸어보니 부드럽게 손가락을 거스르는 종이의 감촉이 좋았다. 다음장을 넘겨보니 단아한 글씨체가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필체. 너의 필체였다.
놀랬지?로 시작하는 너의 문장은 나를 살짝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걸 네가 썼다는 거구나. 나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명료한 모습으로 몇 번이나 이 노트에 글을 적을 수 있을까.
차오르는 고마움과 동시에 눈이 뜨거워졌다. 멜버른과 시드니를 오가는 일이 쉽지 않아 일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고. 다시 복귀하기로 약속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노트 속에서 너는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말라니. 어떻게 너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머릿속이 아득해지려 한다. 안돼. 안돼. 조금만 더. 네 글을 읽기만 하고 내 말은 하나도 못 했는데… 안…. 돼……
고개가 까딱 떨어지려는 걸… 한줄기 가느다란 의지로 부여잡았다. 노트에 끼워져 있는 펜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쥐어보려 하지만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요양원이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근육이 점점 사그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 생명줄처럼. 나는 손가락에 힘을 그러모아 펜을 쥐었다.
내가 평생을 아껴 온 오영. 노트를 펼치니 내 눈앞에 네가 가득하다.
시드니에 처음 도착한 날, 내 손에는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하나만 달랑 있었다. 배낭을 멘 채로 무겁지도 않은 캐리어를 끙끙대며 여기에서 저기로 끌고 다니다 겨우겨우 찾아낸 공중전화부스. 그 와중에도 캐리어를 지켜야 한다며 어디서 힘이 났는지 캐리어를 번쩍 들어 부득이 부스 안으로 넣었었지. 그날이 너와 같은 호주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마셨던 첫날이었어. 외우지도 못해서 가방 저 안쪽에 챙겨 놓은 네 전화번호를 좁은 부스 안에서 부스럭부스럭 찾아 꺼내는 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었어. 저 여자 무슨 일 있나 하는 궁금증을 담은 파란색, 노란색, 밝은 갈색과 잿빛을 가진 눈동자들이 말이야. 드디어 네 전화번호를 찾아들고 나는 좁디좁은 공중전화부스가 뒤흔들리도록 방방 뛰었던 기억이 나.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그동안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을 여기에 다 적을 시간이 있을까? 아니, 남은 시간보다 내가 제정신으로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시간은 그 안에서 얼마나 될까? 오영....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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