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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Anne Jun 26. 2022

방황은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다.

<열두 발자국> by 정재승

낯선 장소에 가게 되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핀다. 눈에 띄는 간판이 있는지, 실내로 들어갈 때면 양 옆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등 온갖 이미지를 기억 속에 남겨 놓으려 신중하게 살펴본다.


어느 정도의 수준을 길치와 방향치로 부를 수 있을까? 나를 놓고 보자면 나는 길과 방향을 유념해서 기억해놓지 않으면 한 순간에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다. 같은 장소를 낮과 밤을 달리해서 볼 때 전혀 다른 곳으로 인식하는 것은 부지기수다. 이런 나에게 스마트폰의 등장은 구원자와 같았다. 내 손안에 지도가 있다니. 어플만 켜면 내 위치를 확인하고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찾아서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반면에 남편은 길눈이 참 밝다. 처음 가는 장소도 지도로 슥슥 확인하고 나면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뚝딱 도착해있다. ‘가던 길도 다시 보자’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는 나에게 그의 능력은 마치 요술방망이 같다. 어느 골목에 들어가도 뚝딱! 하면 목적지에 다다르니 길치 아내에게는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집 보물 1호와 2호의 길 찾기 능력은 아빠를 닮았다. 2호는 돌이 갓 지나고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 엄마를 제쳐두고 혼자 그 작은 걸음으로 집에서 5분 거리인 형아의 유치원을 찾아갔다.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당차게 걸어가는 그 걸음에서 느껴졌다. 이 녀석 길을 정확히 알고 가는구나! 그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1호는 내가 운전하다가 다른 길로 들어서면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늘 확인하곤 했다. 마치 길을 복기하듯이 처음 다녀온 장소는 아빠의 핸드폰을 열어 지도 어플을 켜고 목적지였던 곳부터 집으로까지의 경로를 확인하고, 그곳 주변에는 어떤 가게들이 있었는지 일일이 확인을 하곤 한다.


나는 분명 다른 종족들과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 정재승 박사님의 <열두 발자국>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를 알려면 세상에 대한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싶은지,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내가 그린 그 지도 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열두 발자국> by 정재승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구글맵처럼 모든 가능성과 기회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있는지 알려주는 어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박사님은 그런 지도를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단을 보니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되었다.


학교는 젊은이들에게 지도 기호와 지도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착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길 찾기를 열심히 훈련시켜 세상에 내보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지도를 그리는 일입니다. 누구도 여러분에게 지도를 건네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지도는 여러분 스스로 그려야 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나는 어디에 가서 누구와 함께 일할지,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10년 후 지도는 어떤 모습일지, 나는 누구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지,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지도 위 어디에 있는지,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지도를 주지 않아요. 세상에 나온 우리는 적극적으로 방황하는 기술을 배워서 자기 나름대로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 <열두 발자국> by 정재승


여기서 내 두 눈에 확 꽂히는 문구가 있었다. 바로 [방황하는 기술].

생각해보면 내가 그동안 지나온 길 위에서의 방황들은 나를 생존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이 와도 조금씩 조금씩 헤쳐 나왔던 지나온 길이 있기에 용기 내어 맞설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예전만큼 두렵지 않음은 나에게도 어느새 방황하는 기술이 쌓여 단련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삶이라는 거대한 도화지 안에서 경험은 때로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으로, 여기저기 이어진 도로로, 목적지를 향해 쭉 뻗어있는 고속도로로 그려진다. 그 수없이 그려진 경험의 지도 안에서 우리는 더 나은 길을 찾으며 결국에는 목적지에 다다른다.


내 안에 지도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자신을 오랫동안 꾸준히 섬세하게 잘 들여다보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너무 작아서 돋보기, 그도 아니면 현미경으로 자세히 보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 시간들을 거쳐서 만들어진 자신만의 지도라면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을 테니 그만큼 현명한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아이들이 스스로 한가닥 한가닥 그려가는 지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을까? 그 안에서 바른길을 찾을 수 있게끔 지도 기호와 읽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 부모와 교육 시스템이 해야 할 일이라는 박사님의 말씀에 더없이 공감했다.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곳에 도착하도록 푸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주고, 믿고 지켜봐 주는 것이 부모의 자리에 선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잘못 들어선 길이 더 나은길로 인도하는 경우도 많으니 결국엔 겪어봐야 알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방황하더라도 꼭 가보고 싶은 길을 가봐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수없는 방황의 기술로 그려낸 당신의 지도, 인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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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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