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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Anne Jun 17. 2022

삶이 녹아든 설렁탕 한 그릇 하시렵니까?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by 이순자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by 이순자


읽는 내내 나의 엄마가, 나의 할머니가, 나의 시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리고 곧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노년의 나의 모습도 이분의 책을 통해서 만났다.


기록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아니,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당장 어제 뭘 먹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로서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아도 희뿌연 안갯속에서만 머물고 있었다. 그 안갯속 중간마다 존재하는 선명한 기억들은 오직 나의 시선에서만 남겨진 기억이다. 또한 안갯속에 존재하는 만큼 언제 희뿌옇게 물들어갈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기록해야만 했다. 나의 삶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을, 미래의 내가 꺼내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을 남겨 놓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쓰는 이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어느덧 일 년이 다되어가는 시간에 너무도 우연히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만났다.

이순자 작가님의 유고 산문집.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진한 설렁탕 냄새가 났다. 여러 가지의 재료들을 정성스레 손질해서 오랜 시간 푹 우려내진 담백한 국물이 다소곳이 뚝배기에 담겨있다. 뜨끈한 국물을 호호 불어 호로록 들이키고 나면 절로 바닥이 보일 때까지 수저질을 멈출 수가 없다. 그녀의 국물에 녹아든 삶의 희로애락은 독자의 고단했던 인생을 한결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바꿔놓는다.


나는 보았다. 작가의 시선에 따라 고단한 삶도 누군가의 마음 깊은 곳에 뭔지 모를 어떤 울림을 던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길지 않은 삶, 내가 스쳐왔던 수많은 인연들, 힘들었지만 잘 버티어 이 자리까지 달려온 일상을 내 꽃이 지기 전에 나도 할 수 있다고, 자신도 늦은 나이에 해냈으니 너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한 글자 한 글자에 희망을 심어 보여주셨다.


누군가는 늦었다 생각하는 나이에 자신의 꿈을 찾아 배움의 길을 걸으시고, 이렇게 진국으로 만들어 남겨주심이 독자로서 더없이 감사했다.


내 글은 또 어떤 꽃이 되어 세상을 향해 피어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고 이순자 작가님처럼 생명력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이 펜을 놓지 않으리라 나에게 되뇌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고 이순자 작가님. 부디 편안하시길… 그곳에서 쓰고 싶으셨던 많은 이야기들 원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쓰시길 기도합니다.


#기록하는삶 #annesreading

#예순살나는또깨꽃이되어 #이순자

#독후록


사진출처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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