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뿌리내린 의심이라는 씨앗 하나

그의 이야기

by YJ Anne

늘상 다를 것도 없는 하루가 흘러갔고,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울컥 치미는 화가 많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은 직장 앞을 매일 아침 9시부터 점심시간 즈음까지 서성인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내 안에 불시로 터져 나오는 지랄 발광 불치병 때문인 것을. 하지만 누군들 처음부터 그랬을까? 악인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걸까? 당신은 그렇다고 믿는가?


사랑했었다. 아니, 나는 하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친구들은 와이프가 조센징이라고 나를 놀리면서도 한결같이 환한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면 자신들이 민망한지 괜스레 쭈뼛대며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눈길을 피했다. 그때마다 나는 녀석들을 ‘머저리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네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등신 머저리였다.


하나는 빼어난 미모를 가진 예쁜 여자는 아니었다. 예쁘다 보다는 단아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다른 여인들에게서는 잘 느낄 수 없는 어떤 기품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면 악의에 찼던 마음조차도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친구들은 그녀가 조선인이라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신붓감이라며 침을 질질 흘리며 개처럼 왈왈 댔지만 나는 달랐다.

하나 앞에서는 그녀의 조국도, 나의 조국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주변의 많은 지인들 대부분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름이 사랑의 방해물이 될 거라 수군댔지만 서로를 향한 우리의 믿음은 굳건했었다.


함께 다니던 인쇄소에서 그녀가 내 눈에 눈부시게 다가온 그 첫 순간부터 그녀는 내 마음속에서만 존재했고,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은 마치 영원불변할 것만 같았다. 아니, 나는 확신했었다. 바로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시마 부국장이 우리 인쇄소로 발령받은 날, 내 인생은 저주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나와 시마, 그리고 나, 우리 셋은 만나서는 안될 운명이었다. 하필이면 시마가 발령받은 날 다과실의 청소 당번은 하나였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유독 날이 선 바람이 휘몰아쳤다. 직원들과 인사를 끝낸 부국장은 따뜻한 녹차로 추위에 떨었던 몸을 녹여야겠다며 다과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시마는 하나와 첫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단아한 그녀의 미소에 그도 빠져들었다는 걸, 그 누구도, 심지어 시마 자신조차도 몰랐다.


첫인사를 나누던 두 사람은 다과실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아니, 수줍은 듯 그냥 눈인사만 나누었을 수도, 아니면 차를 따르는 도중 손 끝을 스쳤을까? 과연 나는 무엇이 궁금한 걸까? 그날 둘이 처음 만났다는 것은 내가 시마의 멱살을 휘어잡은 날 알게 되었다.


하나… 그녀를 향했던 내 마음은 시마의 눈빛을 알아채던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분노로 바뀌어 뜨겁게 들끓는 화산처럼 변해버렸다. 수시로 변덕이 끓어 넘쳤고, 불시로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내 화는 그녀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어느샌가 나의 주먹은 그녀의 몸 어딘가에 자꾸 상처를 내었다.


남들은 의처증이라 불렀고, 나는 이 모든 원인이 그녀에게 있다고 믿었으며, 아내는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지옥 같은 날들을 자신이 버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현실 지옥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오직 나, 등신 같은 찌질함을 내뱉는 나의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 살면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대우는 하나를 조금씩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고, 그런 그녀에게 오직 한 가지 구원의 빛이 있다면 그것은 나여야만 했다. 인쇄소 제1팀장. 공장 저 구석에서 까만 잉크 먼지를 들이키며 일하는 그녀를 직원들의 눈초리를 당당하게 무시해가며 업무환경이 더 나은 활자실로 옮겼다.


그녀는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한결 같이 온화했다.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온화함은 마치 탱글탱글한 우유 푸딩처럼 혀에 달콤함이 느껴질락 말락 부드럽게 내 혀를 감싸고돌았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흡수해버리고 싶었다. 오직 내 것으로만, 스쳐가는 바람으로도 혹여나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가질 수 없도록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시간은 당연히 내 편이라 생각했다. 내 마음을 알아챈 그녀도 조금씩 마음을 내어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한 해가 다 가기도 전에 많은 이들의, 특히 내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다섯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의 사랑은 그 어느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점점 단단해지는 성벽처럼 느껴졌다. 시마가 나타나기 전까지 나는 단 한차례도 그녀의 사랑을 의심한 적이 없었으며 우리의 사랑의 영원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사랑은 완벽했다.


특히 결혼하고 일 년이 다되어 갈 무렵 태어난 우리 딸의 얼굴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녹여주는 엄마의 그 미소가 똑같이 녹아 있었다. 닮았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하다. 하나가 내 것으로 여겨졌을 때에 딸의 미소는 나의 온 세상을 밝혔지만, 하나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순간, 딸의 미소도 나에겐 무의미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시마와 하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에 뿌려진 의심의 씨앗 하나는 적절한 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무성하게 잎을 뻗어가며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기름진 토양에 불신의 씨앗이 한줄기의 뿌리를 내려 나의 내면의 어두움을 마음껏 들이키기 시작한 날은 작년 하나미(일본 벚꽃 축제) 때였다.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딸을 데리고 동네 축제에 다녀오겠다며 분홍색, 연노랑의 유카타로 화사하게 멋을 낸 아내와 아이를 보며 흡족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만들어 선물해줬다던 구슬 팔찌를 잃어버렸다며 아내는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것이 악마가 내 눈앞에 먹음직스럽게 놓아둔 ‘의심’이라는 미끼였을까?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퇴근하던 길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차의 룸밀러에 걸려있던 그 팔찌를 보았다. 색색의 구슬이 무지개 색으로 두 번 반복되어 만들어진 아내의 팔찌. 딸이 만들어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 팔찌. 그런데 그것이 왜 낯선 차에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보았던 낯선 차의 주인이 부국장 시마였다는 것은 다음날 아침 회사 주차장에서 우연히 시마를 마주쳤을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차 안의 룸밀러에는 여전히 아내의 팔찌가 걸려있었다.


만약에 내가 바로 그날 저녁 아내에게 낮에 보았던 상황을 물어봤다면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을까? 하나미 축제에서 그녀와 시마가 우연히 마주쳤다면?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내 머릿속에선 이미 사실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에 의심의 싹이 자라나기 전에 그녀에게 먼저 물어봤어야만 했다. 내 속에 숨죽여 있던 열등감의 활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먼저 물어봤어야 했다. 나를 두려워하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기 전에 그녀의 이야기부터 들어봤어야 했다. 허나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야수에게 고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삐 풀린 야수여도 상대는 시마였다. 회사 부사장 시마 구로사키. 이제 갓 마흔이 되어 앞이 창창한 회사의 기대주. 그리고 미혼이었다. 사실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하나를 그의 탄탄대로 인생에 끼워 넣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어떤 경우 인생이라는 녀석은 아주 짓궂은 장난으로 멀쩡했던 한 사람의 삶을 망치기도 한다. 분을 품고 돌진하는 야수가 시마의 멱살을 잡은 그날 부사장은 인정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고. 그래서 고민을 무릅쓰고 고백해보려 했지만 그녀가 결혼했으며 남편이 한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고… 자신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대체 무엇이 미안한 걸까? 이미 배우자가 있는 여자를 연모한 그의 마음일까, 아니면 나라는 지옥에서 그녀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일까.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해야 할 사람은 쓰레기 같은 나인데 왜 시마 당신이 미안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사장을 찾아가기 전, 나의 더럽고 찌질한 열등감은 오직 아내를 향해서만 분출되었다. 의심의 싹이 자라고 위로 줄기를 뻗어나가 나보다 더 큰 나무가 될 때까지 오직 그녀만이 내 분노의 대상이었다. 왜 아내는 나에게 해명하지 않았을까? 아니, 해명을 했었나? 그녀의 부정이 내 귀에는 한낯 그저 핑계 같은 거짓말로만 들렸던 건 아닐까? 내가 믿고 있는 그녀의 외도가 실은, 나의 지저분한 열등감과 질투로 인한 추잡스러움이 만들어낸 허위는 아니었을까? 시마라는 존재가 나의 현실에 들어온 후 나의 버러지 같은 허상 걷잡을 수 없이 추악해졌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멈출 수 없었고, 나는 그렇게 매일매일 우리 가족을 시궁창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내 속에 들끓던 분노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아버지에겐 살랑살랑 웃음을 날리며 뒤로는 나를 가두고, 때리고, 괴롭히던 조선족 계모일까? 아니면 나는 처음부터 악마로 태어난 걸까?


시마 부사장을 찾아간 일로 인해 결국 회사에서는 해고되었고,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어버린 나는 늘 술에 쩔어 있었다. 매일 같이 내 속을 가득 채워갔던 술은 열등감의 분출을, 아내와 딸에게는 비명을, 이웃들에게는 공포와 긴장감을 조성해 나갔다.


이웃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행해지는 매일같이 계속되는 폭행으로 인해 아내와 딸은 점점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으며,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의지와 생명이 사그라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매일 아침 분을 이기지 못해 회사 앞을 서성이는 시간만이 오직 그들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잘못 뿌리내린 씨앗은 과연 돌이킬 수 있는가?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 답하겠는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에 잔뜩 취해 회사 앞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던 나를 건달 무리가 다가와 흠씬 두들겨 팰 때, 나는 영혼 없이 주절거렸다. 돌이킬 수가 없다… 이 시궁창 같은 의심의 늪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이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뒷골목에서 사정없이 두들겨 맞은 나는 모든 의지를 잃은 채 바닥에 그저 널브러져만 있었다.


아… 그 팔찌는 어쩌다 부사장의 차에 있게 된 걸까… 부사장에게도 그녀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내 생명이 사그라드는 이 시점에 아내와 딸을 향한 미안함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딸이 만들어준 아내의 팔찌가 어떻게 시마의 차에 걸려있게 되었는지 따위가 궁금했다. 내 의심이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었다고 고집스레 믿고만 싶었다. 제기랄… 그것을 알아냈어야 했다.


그날 밤은 몹시도 추웠고, 나는 그렇게 차가운 길바닥과 한 몸이 된 채로 싸늘하게 식어 갔다. 시리고 시린 그 순간 희뿌옇게 보이던 내 손에는 아내의 팔찌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존재의 여부조차도…


악인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가? 나는 악인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의심의 씨앗 하나를 뿌리내렸을 뿐, 그뿐이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짧은소설 #컵소설 #습작 #소설 #초단편소설

매거진의 이전글엄마의 돈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