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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Anne Oct 09. 2023

그녀 다웠다. 미쳐있는 것이 딱 그녀 다웠다.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강혜정

언젠가부터 내게 ‘미치다’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어감보다 긍정적인 어감이 조금 더 많이 느껴지는 단어가 되었다. 아마도 위인전을 읽고 난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되는데 이유는 위인전에 있던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꼭 어딘가에는 미쳐있었던 것 같다고 느꼈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다 못해 완연히 빠져들어서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 그래서 사리 분별보다는 지금 빠져있는 것이 충분히 충족이 되어야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상태. 왠지 무언가에 미쳐 있다고 생각하면 딱 이런 상황이 내 머릿속에 그려진다.


‘강혜정’ 그녀가 등장하는 여러 영화를 봤지만 단연 내 머릿속에 팍! 하고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은 [웰컴 투 동막골]의 머리에 꽃을 달고 해사한 웃음을 머금은 그녀 여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여일이 강혜정 같고, 강혜정이 여일이 같았다.


그녀가 연기한 수많은 대단한 작품들이 많고 많지만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그녀가 참 좋았다.

그녀가 좋았는데 어느 날 그녀는 기사 한 꼭지로 인해 나에게 단번에 꼴도 보기 싫은 그녀로 전락해 버렸다. 그 기사는 바로 결혼 발표 소식이었다. 남편이 글쎄 타블로였다.


타블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내가 한 때 정말 미치도록 빠져있던 래퍼다. 나의 20대 중후반의 마음은 온통 그에게 빼앗겼다고 할 정도로 나는 그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에픽하이라는 힙합 그룹은 세 명의 래퍼로 구성되어 있는 팀인데 타블로를 제외한 미쓰라와 투컷은 이름과 얼굴이 정 반대로 매치된 채로 몇 년을 보냈을 정도로 나는 타블로 밖에 몰랐다. 노래 속 그의 라임은 마치 한 줄기의 은혜처럼 내 온몸을 훑었고, 나는 비트와 함께 그의 목소리에 젖어들었다.


그의 앨범을 사고, 책을 샀다. MP3에 담겨있는 그의 음악은 늘 재생목록의 탑이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발표를 했고, 아내가 될 사람이 바로 강혜정, 그녀였다. 그때부터 돌연 그녀가 보기 싫어졌고, 그녀를 선택한 타블로도 싫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싫어지거나, 더 좋아지거나.


시간이 지나고 나도 결혼을 하고 나서는 사실 시간이 지나니 좋아했던 마음도, 그녀가 싫어진 마음도 시들시들 해졌다. 한 때 열정적으로 좋아했었던 가수였다 정도랄까?

더군다나 호주에 오고 나서는 한국 방송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더 그와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저 기사에 가끔 나오면 잘 살고 있구먼, 흥! 했던 것 같다.


얼마 전 밀리의 서재에서 뭐 읽을 책이 없나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되었다.

그녀, ‘강혜정’씨가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제목부터가 딱 내가 좋아했던 예전 그녀의 모습 같은.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


괜히 궁금했다. 한때 내 마음속에 질투심을 솟구치게 만든 그녀가 에세이를 썼다고?

그래. 무슨 얘기를 썼는지 한번 볼까?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좋아했었던, 연기에 미쳐 있었던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가 정말 궁금했다.


책을 발견하자마자 우선 이북 리더기에 다운을 받아놓고 첫 페이지를 읽었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 내내 그녀의 이야기는 내 손을 떠나질 못했다.


에세이 집을 처음 냈다고 하기엔 필력이 돋보였다. 내 눈을 사로잡았고, 마음을 인질 삼았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틈이 날 때마다 적어 내려갔다고 하는 그녀가 내 눈에는 ‘도무지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읽혔다.


속을 다 내보인 듯 솔직했고, 펄펄 끓고 있는 물처럼 뜨거웠으며, 때로는 꽝꽝 얼어버린 한겨울의 수도꼭지 마냥 냉정했다.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글에서는 백 년 묵은 고구마가 방금 딴 사이다를 만나 콸콸 뚫려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책장을 덮고 나니 한때 아주 많이 좋아했던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의 글귀들이 내 귓가에 윙윙대고 있었다. 꿀벌 한 마리가 아니라 크나큰 벌집을 하나 제대로 건드려서 내 온몸을 윙윙거리며 싸고도는 몇 천 마리의 벌떼처럼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고 나니 내 속이 궁금해졌다.

갑자기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다.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내게 늘 힘들고 버겁기만 했었는데 그녀의 글귀들을 만나고 나니 나고 쓰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가까운 나뭇가지들이 난을 칠 때 사람들은 겨울을 허전하게 여긴다. 하지만 난 비워진 것들이 좋다.

  그저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 역할도 없이 쌓인 물건들을 버리고 차곡차곡 잘 정리해 비워진 공간. 해야 할 일보다 이거라도 할까, 혹은 하면 좋겠다 싶은 일들을 과감히 제치고 의무감만 걸러낸 적당히 비워진 시간. 메세지, 카톡, SNS, 메일 등 ‘나’와 연결된 것들에서 망설임을 삭제하고 정제된 관계. 꽃가루가 이목구비를 괴롭히고, 더위가 숨통을 틀어막고, 존재감 없이 짧은 추락 끝에 썰렁하게 비워진 계절. 그 겨울.

  이 모든 것들이 가히 희망적이다. 시야가 트이고 게으를 여유가 생기고 불필요한 말이 일상을 훼손하지 않고 비워진, 감춰진, 밀폐된 겨울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래서일까, 종종 가득 채워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때가 있다. 외형이든 내면이든 자신의 부분을 드러내는 것 역시도 거리낄 때가 있다. 채움과 비움이 영역다툼을 할 때마다 외로움이 살랑거리지만 참을 만하다.

  그래서일까, 또다시 그 겨울을 지나 한 겹 한 겹 옷차림이 가벼워질 때마다 지레 아쉬움이 스민다.
- <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 강혜정 - 밀리의 서재


비워진 것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를 만나고 되려 내 속은 채워졌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참 좋아했던 가수 타블로가 그녀와 왜 사랑에 빠졌는지를…

아니, 알기보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녀의 생각을 마주하고 난 뒤 나도 그녀의 매력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어서 한 때의 팬으로서 다행이기도 감사하기도 하다.


그녀는 비워진 것이 좋다는 데 나는 채우고만 싶다.

그녀의 이야기로 가득 찼던 그녀의 핸드폰처럼 나도 이제는 내 이야기로 나의 공간을 많이 많이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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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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