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두려움의 공존 구간을 말하다.

by YJ Anne

처음엔 여행자였고, 이제는 로컬인이다.

설렘과 두려움을 품고 호주 공항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지 벌써 10년이라니.

그중 5년은 독박 육아 진행 중이고 지금 2년째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 상황이다 보니 매일매일이 나에겐 전쟁이었다. 아… 쉬고 싶다. 어디론가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했다. 여행 사진첩이라도 들춰볼까 하는 마음에 앨범을 뒤적이다가 돌하르방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아… 나의 첫 혼 여행이 제주도였지. 사진 속의 나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나는 어느새 그때 느꼈던 기대와 흥분을 고스란히 안은 채로 제주를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해 8월은 설레었다. 그리고 혼자일 때 마주할 수 있는 최대의 두려움과 정면 승부했던 여름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귀에 익은 듯 들리는 단어가 있다. 혼밥, 혼술, 혼 여행 등 혼자 하는 무엇인가를 꾸며주는 형용사 ‘혼’. 나의 20대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내가 성장하던 1980~90년대의 대한민국은 대가족에서 핵가족화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이루어가자며 ‘하나’, ‘함께’, ‘손에 손잡고’를 외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함께가 아닌 혼자는 환영받지 못한 일처럼 느껴졌던 나의 20대였다.


사춘기가 된 이후부터 쭉 내 마음속에 꿈꿔왔던 혼자만의 여행.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반발심이었을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그런 마음. 오매불망 딸의 안전을 걱정하는 우리 아빠를 보며 나는 아빠의 사랑이 답답한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울타리의 바깥은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나는 그곳을 달리고 싶어 안달 난 한 마리 망아지처럼 그렇게 여행을 향한 갈증은 타들어가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정말 눈앞에 현실로 그려진 설레는 여행 계획. 하지만 그 설렘의 반대편에 서있는 나는 무서웠다. 낯선 곳에서 나쁜 사람을 만나서 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내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절벽에서 떨어지면 어쩌지? 인생에서 막연하게 늘 상상만 하고 있던 그 날선 두려움들은 아빠의 상상 속에서만 있지 않았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가끔 뉴스에 등장해 나를 현실에 직시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나에겐 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먹구름들을 물리칠 강력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흔하게 바로 버스나 기차를 잡아 타고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닌 저 멀리 어딘가. 제주도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한 달여간 내 마음의 설레임 씨와 함께 여행 계획을 짜고 무서움 씨는 잠시 뒤로한 채 2006년 8월 나는 제주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었다. 꿈에 그리던 비행기를 타고 태어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본 세상은 저곳에 누가 살고 있나 할 정도로 아득하고 현실성이 없게만 보였다. 이렇게 넓은 세상에 나는 어디메 살고 있는 건지…


제주공항에 도착한 나는 첫 여행지인 국제 제주 박물관을 가는 버스를 찾아 공항을 세 바퀴나 돌며 헤매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지만 그러면 어떤가?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고 꿈꿔왔던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여행의 설렘은 마치 내 몸에 신비의 묘약을 한 방울 떨어뜨려 두려움으로 잔뜩 드리워있던 안개를 걷어낸 것 같았다.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은 찬란한 한줄기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세상으로 어느덧 바뀌어 있었다.


여행 둘째 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서귀포시에서 우도로 향하는 일정을 위해 버스 첫차를 알아보러 정류장으로 갔다. 알아보는 김에 근처에서 머무를 찜질방을 찾아보려 했다. 그때 정류장에서 쉬고 계시던 버스 기사님들을 발견한 나는 가장 인자해 보이시는 기사님께 말을 걸었다. 나의 질문에 그분은 첫차를 타고 갈 거면 오늘 성산항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아침에 항구로 향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본인이 아시는 찜질방이 바로 그 항구 근처에 있다고 하시며 자신의 버스가 그 정류장을 지나가니 나를 내려줄 수 있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잠시 잠깐 내 안의 무서움 씨가 낯선 사람은 경계하라며 나를 제지했다. 한데 오늘 성산항에 도착한다면 우도와 더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아주 좋은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설레임 씨는 무서움 씨에게 괜찮다고, 선량해 보이는 기사님이라며, 설마 승객이 나 혼자는 아닐 거라고 조곤조곤 설득했고 그렇게 나는 그분의 버스를 타고 성산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승객이 나 혼자는 아니었다. 해안도로를 타고 서귀포시부터 성산일출봉 바로 지나서까지 가는 버스이기에 승객은 거의 꽉 찰 정도로 많았다. 기사님은 가는 도중에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는지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타라고 하셨다. 그렇게 안전한 버스 여정은 시작되었고 나는 중간중간 보이는 해안도로의 경치를 눈에 담으며 아저씨와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고 있었다.


아저씨가 이야기해주셨던 여러 관광지 중에 연혼포와 혼인지가 있었다. 제주도 동쪽에 위치해 있고 탐라국 왕자들과 혼례를 치르기 위해 벽랑국 세 공주가 상륙한 곳이란다. 혼인지는 이들이 혼례를 올린 장소인데 커플들이 많이 간다고 하셨다. 잠시 백밀러로 마주친 아저씨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서려있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청혼을 그곳에서 하셨단다. 하아… 순간 나도 남자 친구를 만들려면 연혼포를 가야 하나? 생각했었다.


20대의 한창 연애세포가 활발하던 나는 아저씨의 연애담을 더 듣고 싶었지만 어느새 목적지에 다와 가고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정류장. 내릴 때 마저 몇 번째 골목에서 꺾어가야 찜질방 간판이 보이는지 상세히 안내해주신 덕에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내 안의 무서움 씨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볼까? 좋은 아저씨를 만난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약간 공포스럽게 조명해보면 위험해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만약 승객이 나 하나였다면? 가는 길에 아저씨가 내려주신 곳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바위로 둘러싸인 어두컴컴한 제주 바닷가였다면? 생각만 해도 온 몸의 털이란 털들은 다 솟구칠 만큼 무서운데 그때의 나는 여행이 주는 설렘으로 인해 두려움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듯했다. 가끔 뉴스에서 만나지 않는가?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철부지 젊은이들이 벌이는 사고들도 있지만 심각한 범죄도 많다. 이래서 어른들은, 특히 딸을 키우는 부모님들은 혼자 하는 여행은 상상도 하기 싫겠구나 라는 생각이 내 아이를 낳고 그분들의 입장이 되어보니 뼛속 깊이 이해가 간다.


기사님이 나를 보시고 처음으로 하셨던 질문은 ‘여행 왔어요?’였고, ‘혼자?’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네~’라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나의 모습에 그분의 다음 말은 뭔가 족집게였다.

‘아가씨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살아보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욕심이 많더라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해봐야 하고, 그래서인지 여행 계획이 다른 사람 때문에 바뀌는 것도 대부분 싫어하더라고. 그래서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한다던데 내 말이 맞지?’


어떻게 내 마음에 들어갔다가 나오셨지? 이게 연륜이라는 건가?

세상은 넓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이것저것 다 할 순 없지만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있다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라는 사람. 내가 생각해도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욕심이 많은 나.

수많은 손님, 더군다나 여행객이 대부분일 테니 한번 보고 지나쳤을 그 많은 손님들을 마주쳐온 아저씨의 세월이 뭍은 눈빛에서 나 자신이 내어져 보이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 같다.


내가 욕심이 많은 건 타고나기도 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을 찾아보자면 보수적인 아빠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아빠는 내가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본인 생각에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은 많은 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를 들자면 친척집이나 1년에 한 번 있었던 아주 안전한 학교 수련회 외에는 외박은 절대 불가였다. 때문에 여행이 너무 하고 싶었던 나는 성인이 된 후로 그동안 못해온 반항에 반항을 더한 느낌으로 아빠의 과보호에 맞서 싸워 나의 독립을 이뤄내었다. 그 후 제주도는 몇 년 뒤이긴 하지만 내가 부모님을 떠나고 나섰던 첫 여행이었다.


그랬던 나의 그 치열한 삶을 처음 본 아저씨가 읽어내신 것 같은 느낌이라 왠지 모르게 내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지만, ‘여자가 그러면 안돼’라고 질책하는 눈빛이 아닌, 왠지 이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빠로부터 받고 싶었던 이해와 인정의 부재를 그 눈빛으로 인해 조금 위로받는 듯했다..


가족은 알아줬으면… 하지만 때로는 너무 가까이 있어 되려 알아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받는 위로가 그 마음을 도닥여주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이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은 부모가 된 이후,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고마운 마음속 저 깊이 어디 한구석에 끼어있는 가시처럼 원망함으로 남아있는 하나는 아빠의 무책임한 과보호였다.

어떻게 부모의 과보호를 무책임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분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본인의 판단에 위험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하지 못하게 막기만 하는 것은 책임 있는 행동일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이렇다. 위험한 상황은 꼭 인지시켜주되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도 안내해줘야 한다. 그리고 갈 수 있는 여러 개의 선택지 중에 적어도 결정은 자신이 내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어릴 때는 부모의 보호막을 최대로 펼쳐서 있는 힘껏 지켜줘야 하지만 이마저도 아이가 커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빠는 좋은 부모였지만 딸을 과보호했던 지점만큼은 돌아보면 무책임하다고 느껴진다. 사람은 실수를 한다. 부모도 실수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실수를 통해서 인생을 배운다. 나도 그럴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 누구보다 완벽한 부모는 될 수 없지만 내 부모의 좋은 점은 배우고, 그분들의 실수를 통해 내가 깨달은 점들은 또 나만의 방법으로 내 아이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과잉보호하는 부모는 자식을 최고의 거짓말쟁이로 만든다’라고 했던가?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우리 아빠는 나의 이 여행을 내가 1년쯤 뒤에 아셨다. 아빠에게 있어서 말 잘 듣는 딸로 남았던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위의 문장은 적어도 나에게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그랬던가? ‘내가 원했던 부모를 가질 기회는 없었지만 내가 원했던 부모가 될 기회는 있다.’라고… 나의 부모님은 완벽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지금 그분들이 부모였던 인생점에 서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원했던 100%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95% 이상이었고, 그분들의 인생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나는 내가 원했던 부모가 될 기회의 끈을 잡고 있다.


언젠가 내 아이들이 크면 나에게 엄마의 과보호 때문에 자신들이 마음껏 날아가지 못했다고 얘기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고 그들을 최고의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한 나만의 공포와 마주하고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그렇게 내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두려움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조금씩 성장하다 보면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매일 조금씩 더 좋은 부모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보니 육아도 설렘과 두려움의 공존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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