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관이 막혀 버렸다.
애들이 무사히 잠들고 마치 몸이 빠져나오지 않은 것처럼 기어서 침대를 빠져나와서 내가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육퇴를 하고 난 후에는 아직 끝내지 못한 살림을 해치워야 했다.
조금 더 신나게 설거지를 하기 위해 에어팟을 꽂고 유튜브를 틀었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고무장갑을 야무지게 장착하고 식세기 이모님에게 부탁할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크기에 맞춰 정갈하게 집어넣고 나니 1호의 도시락만 남았다. 이건 뜨거운 물로 후딱 해버려야지 싶은 마음에 식세기 시작 버튼을 누르고 설거지를 위해 물을 틀었다.
촤아~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물이 나오는 반대편의 개수대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이런 난감한 상황은?
당황해서 수돗물을 끄고 개수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랬더니 항상 콸콸 잘 내려가던 물이 마치 나무늘보가 기어가는 것보다 더 느리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줄어드는 게 아닌가.
느낌에 싸했다. 설마 막혔나? 하면서 개수대 구멍을 휘적여 보아도 물은 예전처럼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막혀버린 것이다. 그것도 한치의 살아날 구멍도 없이 제대로 막혀 버렸다.
이렇게 막힌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 때 내 인생이 암울의 동굴을 치달리고 있을 때가 떠올랐다. 살아날 수 있는 바늘구멍 같은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던 나의 20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조금씩 늘 던 아빠의 빚을 성인이 된 후 내 이름으로 대출이 가능하던 때가 되어서 모두 내게 떠 넘기던.
직장 생활하면서 매일 밤을 세우다시피 야근했을 때 받은 택시비들을 아끼고 아껴 저축해 놓은 내 적금 통장을 들켜 아빠의 밀린 세금을 내야 했던.
더 이상 대출도 안되니 하다 하다 핸드폰도 내 이름으로 만들어서 요금을 몇 달이나 내지 않아 내가 신용불량자 통보를 받게 했던.
아빠 자신에게 당뇨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약도, 식습관도, 운동도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챙기지 못하시고 합병증으로 심근경색이 와서 응급으로 수술, 병원비를 12개월 할부로 내가 책임져야 했던 나의 20대가 생각났다.
그때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녁에 알바를 하고, 주말에는 밤샘 알바를 뛰어야 삶을 감당해 낼 수 있었다. 감기에 한 번 걸리면 한 달을 넘게 안녕을 고하지 못했던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도저히 살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던 나의 20대가 막혀있는 개수대에 고인 물 사이에 비쳐 나왔다.
삶을 감당하려 죽을 듯이 애썼던 그때처럼 남편과 나는 새벽 3시가 다되도록 쑤시고, 건져 내고를 반복했다. 막힌 파이프에서는 압착기로 흡착을 할 때 외에는 물이 제대로 내려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흡착을 할 때만 조금씩 조금씩 내려갔고 우리는 뚜러펑이라도 사 올 수 있는 아침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남편은 밤새 물이 조금씩 내려가 비어있는 개수대에 알코올을 부어야겠다며 내가 아껴두었던 이과두주를 쏟아부었다. 우리 집에 있는 술 중에 가장 도수가 높은 술, 가장 순수 알코올에 근접하여 뭔가 기름때를 녹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어볼 수 있는 술이었다.
깐풍기와 함께 먹으면 입에서 꽃향이 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중국 술 이과두주는 그렇게 큰 한 병이 모두 개수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1시간 동안 남편은 1호를 등교시키고 한국의 이마트 크기의 철물점인 버닝스에 다녀왔다. 뚜러펑 2개와 싱크대를 뚫을 수 있는 와이어를 사 왔고, 마음에 드는 무기를 장착한 남편은 뚜러펑을 냅다 들이 붓기 시작했다.
막혀있는 찌꺼기들이 녹을 시간을 줘야 했기에 나는 일을 하러 나갔고, 남편은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시간이 되면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끓여서 부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오전이 갔고, 점심시간이 됐을 무렵 궁금한 나는 차를 잠깐 주차한 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하하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편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인지 난감함의 난감함의 반어법 표현인지 순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헷갈렸다. 알고 보니 너무 뚫리지 않으니 화가 나서 일부러 웃음으로 화를 가라앉히는 중이라고 했다. 하아… 안 되는 건가?
남편은 나에게 싱크대 밑에 있는 U자 관을 열어보겠다고 했다. 왠지 거기가 막혀있는 것 같다고. 열어서 깨끗이 씻은 후에 다시 연결하면 되지 않겠냐고. 남편을 잘 알고 있는 그가 파이프를 열게 놔둘 수가 없었다. 파이프마저 열었는데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제까지 그가 했던 수고들이 화와 짜증으로 솟구쳐 올라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다. 모든 것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
이제는 무모한 도전을 멈추고 전문가의 손길에 맡겨야 할 때라는 확신이 생겼다.
수화기 너머의 남편에게 스톱을 외치고 내가 플러머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오늘 당장 가능한 곳이 있을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구글의 도움을 받아 곧 찾아낼 수 있었고, 다행히 당일 예약까지 마칠 수 있었다. 앞으로 1시간~3시간 안에 도착한다고 했고 남편이 집에서 기다릴 일만 남았다.
예약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플러머는 도착했고, 남편과 함께 집의 구조를 살펴보더니 바로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 어디가 막혔는지 확인했단다. 막힌 곳은 싱크대가 아니고 배수관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었다. 현재 기름때가 많이 끼어있어서 구멍이 현저히 좁아진 상태라고 했다. 최고의 해결책은 파이프를 교체하는 것이었지만 비용이 어마어마해서 세입자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응급처치로 해결을 해줄 테니 앞으로 기름때가 잘 끼지 않도록 잘 사용하라고 남편에게 당부해 줬다. 플러머가 알려준 기름때가 잘 끼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싱크대 개수대에 구멍을 막고 뜨거운 물을 최대한 많이 받은 후에 구멍을 열어서 한 번에 많은 양의 뜨거운 물이 파이프를 통과하도록 주기적으로 해주면 기름때가 계속 쌓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뚜러펑도 정기적으로 해주면 좋지만 뜨거운 물로도 예방할 수 있으니 자주 해주라고도 알려줬다. 기술자의 손길이 닿으니 그가 도착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수관은 시원하게 뚫렸다.
전문가도 아닌 우리가 해결해보겠다고 끙끙대던 시간은 거의 하루였는데 제대로 된 임자에게는 10분이었다.
꽉 막힌 내 인생에도, 내 마음에도 이런 전문가가 있었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지나오지 않았을까? 깊은 상처가 조금은 더 얕아지지 않았을까?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내 마음속 배수관 어딘가가 막힌다면 내가 혼자 해결하려 아등바등하지 않고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시원하게 뚫린 우리 집 싱크대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 깊은 곳에서 응어리져있는 상처들을 뜨거운 물을 토해내듯 속에서 끌어내어 개수대에 쏟아놓고 한 번에 쫘악~ 기름때가 머물러 있는 파이프로 묵은 상처를 내려보내면 답답하게 막혀있던 속앓이도 어느새 펑! 하고 뚫리지 않을까? 꼭 그럴 것만 같다.
그리고 내 상처만이 아니고 누군가의 답답한 마음을 들어주기 위해 내 귀와 내 품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어 주리라. 비록 해줄 수 있는 것이 들어주는 것뿐이라 해도 그것 만큼은 꼭 노력하리라 다짐했다.
우리 제발 혼자 힘들어하지 말자.
막힌 배수관이 전문가의 손길에 금세 시원하게 뚫리는 것처럼 어쩌면 십 년 아니 이십 년이나 고구마 삼키듯 막혀있는 우리네 마음속 배수관도 전문가의 손길에 맡긴다면 묵은 체증도 시원하게 가라앉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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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