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만의한국사 Apr 09. 2021

<자산어보> 황사영 백서와 명성황후

그들은 무엇을 지키고자 했나

2017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서 한국 천주교 특별전이 열렸다. '황사영 백서'도 전시됐다. 지금은 주로 고대사를 공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한국천주교회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황사영 백서'가 마음에 걸렸다. 


황사영 백서 (영인본) (100원짜리 동전과 비교해 본 백서의 크기와 분량)

정조가 죽은 이듬해 신유년(1801)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됐다.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정약용도 이 일로 유배길에 올랐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에 몸을 숨겼다. 1801년 박해를 당한 황사영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문제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바로 '황사영 백서'다. 현재 이 백서는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주변에서 죽어가는 가족들과 교우들을 보면서 황사영은 뭐라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편지는 발각됐고 황사영은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다. 처는 노예가 돼 제주도로 갔다. 




1894년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당했다. 바빠진 조선의 명성황후 정권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당시 영돈녕부사 김병시는 "수렴 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일어났거늘, 타국의 군대를 빌어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반대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보내게 된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여 퇴각했다.


황사영이나 명성황후는 모두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그들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무엇을 지키고자 했나. 황사영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를 배반했고, 명성황후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요청했다. 황사영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종교의 자유를 원했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만약 북한의 어떤 주민이 핍박과 박해를 견디지 못해 유엔에 편지를 써서 군대를 보내달라고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까지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개인보다 국가의 입장이 우선시되었다. 개인의 입장을 앞세우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균형은 맞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국가를 지탱하는 건 국민 개개인이다.


(후기) 1886년 조불통상조약으로 천주교가 승인되어 제주도에도 종교의 자유가 왔지만 이번에는 제주 천주교인들이 관을 등에 업고 제주 백성들을 수탈하게 된다.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봉기가 1901년 '이재수의 난'이다. 그렇게 힘들게 종교의 자유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그를 빌미로 다른 사람을 궁지로 몰았으니…. 인간이 원래 그런 것인지, 역사가 원래 그런 것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밤이다. 


글. 역사학자 조경철 


* 본 글은 조경철 <나만의 한국사> 책에 수록된 부분입니다.


국내 최초 한국사 뉴스레터, 아래 링크로 신청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여자도 부처, 왕이 될 수 있던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