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후의 삶은 실상의 관점으로 현상을 살아가는 것, 이 하나로 귀결된다. '실상'은 무아, 무념, 해체, 저것 등으로 치환될 수 있다. '관점'은 프레임, 패러다임, 가치체계, 도그마 등으로 치환될 수 있으며, '현상'은 생각, 이것 등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의식을 통해 현상계를 살아감에 있어서 의식의 개입 여부와 무관하게 시공간의 개념이 작동하여 현상계의 기반을 구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상의 관점 체득은 무아, 무념, 해체, 저것의 시선이 시공간 개념의 작동처럼 의식의 개입없이 자동적으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시공간의 개념이 현상계를 경험하는 기반을 구축하듯, 실상의 관점은 주재적, 실체적 '나'라는 허상의 해체, 끊임없이 상속되는 생각의 관성에 크랙을 남김으로써 안도로 표현되는 실상에 대한 간접 경험을 각인시킨다.
앞서 '관점'을 '가치체계'로 치환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가치체계에는 위계가 있고, 주로 명예, 권력, 부, 관계, 건강 등 생각의 내용물로 채워져 있다. 그러한 위계의 최상단에 무아와 연기, 자기해체 등이 상정되는 것이 실상의 관점이다.
개념, 범주화, 의미 부여 등은 모두 생각을 기반으로 하지만 실상의 관점은 그 반대인 생각 아닌 것을 향한다. 물론 그곳, 저것은 생각으로 닿을 수 없고, 오직 모를뿐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그렇게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상은 조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계의 여집합적 세계가 아니라 현상계의 드러남 여부와는 무관한 배경, 바탕, 다른 차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이 또한 언어 도단이며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나 생각을 통해 알 수 없다고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통해 아무리 유려하게 설명하고 묘사한다고 해도 저것에 대한 간접 설명에 불과하고, 그 또한 현상계의 연장에 불과하다. 생각으로 더듬는다면 이미 달라 붙은 것.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실상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본질임에도, 그 동안 알음알이로 변죽만 울렸다는 자각 때문이다.
실상의 관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해체, 생각아닌 것에 저절로, 틈틈이 놓여지는 것이다. 이미 생각 아닌 것에 기반된 삶에 생각이 구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전경인 구름이 아니라 배경인 하늘의 관점이 되는 것.
의도적으로 생각을 걷어차고, 생각을 억지스럽게 끊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열심히 매순간 생각을 알아차리고 끊으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이미 생각의 쳇바퀴로 돌아온 것. 저절로, 자연스럽게, 틈틈이, 간헐적, 돌발적으로 단절되고, 환기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생각 아닌 것에 자동적으로 주의를 두게 되는 것이 실상의 관점이다. 조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틈틈이 확인되고 각인되면 된다. 실상의 관점이 현상계 나투는 모습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에 저항없이 내맡겨지는 것.
그렇게 내맡겨지는 것이 저항하는 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편안하고 효율적이라면 그러한 알고리즘의 효용을 기반으로 몸, 뇌 신경망이 알아서 그 쪽으로 길을 낼 것이고, 그 길을 점점 넓히게 될 것이다. 저절로 알아서 그렇게 흐르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