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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딩 숲속 월든 Sep 02. 2023

울타리 바깥

어떤 대화를 나누다가 무슨 뜻인지 그 순간에는 모르다가 뒤늦게 이해하게 되는 것을 형광등에 비유하곤 한다. 분명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모르는 것처럼 여겨지다가 번뜩 알아지게 되는 것이다. 주로 '이게 그거였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처음으로 생각 바탕의 세계를 생각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내뱉은 첫 마디이기도 했다. 그것은 늘 있었고, 거기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음을 명료하게 알아버리게 된 너무나 확실한 서프라이즈여서 기억상실증이 생기지 않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나의 '깨달음'은 그렇게 형광등처럼 찾아왔다.

 

불교에서는 이런 첫 깨달음 체험을 '초견성'이라고 부른다. 본래 성품, 즉 실상을 처음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초견성이 의식에 각인되는 강도와 그런 경험으로 인한 여운의 지속은 사람마다 제 각각이다. 그렇게 깨어나는 것도 대단히 희유한 인연이기도 하지만, 깨어난 이후 뒷수습과 관련된 인연이야말로 깨어남 이상으로 중요하다. 나는 2015년에 처음 한 그 체험이 처음이자 끝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데 7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못해. 그건 제대로 된 깨달음이 아니야. 뭔가가 더 필요해.'라는 생각의 속삭임에 몇 번을 속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번뜩이는 체험이 확신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가 서로를 견인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그런 체험 상태에 놓임을 반복 재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와 같은 체험을 먼저 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며 나의 언어로 갈무리하는 것이었다. 깨어난 이후 이러한 두 가지 과정을 스승이나 조직의 도움 없이 스스로 헤쳐나가는 사기 캐릭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깨어난 이후 자기 강화가 아닌 자기 해체의 바른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새끼가 태어나 어미의 돌봄을 받으며 건강한 독립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듯 말이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깨어남과 돌봄을 위해서는 가족을 등지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는 단체에 들어가야 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야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수행에 관한 온갖 정보와 스승을 자처하는 깨달은 사람들의 다양한 일갈을 접할 수 있다. 다만 접근성은 엄청나게 개선되었는데,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이끄는 옥석을 가리는 것은 것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깨어날 수 있는 조건도 좋아졌지만, 선무당에게 당하기도 쉬워진 것이다. 과거와 현재 중 무엇이 나은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바른 방향을 향하는 인연은 여전히 쉽지 않은 것 같다.

 

며칠 전 예전에 함께 인문학 공부를 했던 지인을 만나 '깨달음'에 관한 토론 아닌 토론을 하면서, 내가 있는 울타리 너머에서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실감했다. 내가 사용하는 용어를 상대가 공감할 수 주장이 논리적이지 않다면, 길을 걷고 있는데 뜬금없이 다가와 '도를 아십니까?'를 묻는 사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뇌피셜이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해든 울타리 바깥의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유튜브에 험상궂은 인상과 표정으로 도대체 왜 이걸 모르냐고 윽박지르며 스승을 자처하는 사람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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