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빌딩 숲속 월든 Sep 17. 2023

힘의 문제


약 2500년 전 고타마는 무아와 연기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많은 이들을 깨어나게 했다. 그 가르침은 불교라는 종교의 근간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무아와 연기에 대한 이해는 그리 쉽지 않았다. 최근 물리학, 신경과학 등의 발달로 불교라는 종교에서 출발하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도 무아와 연기의 가르침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어렵고 난해한 불교경전이나 선어록, 오래된 수행방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깨달음의 정의는 '생각의 바탕이 되는 생각 아닌 미지의 영역을 생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현상'이다. 생각은 호모사피엔스라는 유기체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일체의 작용이다. 깨달음의 정의와 같이 깨달음은 생각의 일이다. 다만 그 대상이 생각 아닌 미지의 영역일 뿐이다. 언어에 기반한 사고작용을 비롯하여, 사고작용을 포괄하는 온갖 생명현상의 근간이 되는 미지, 즉 알 수 없음의 영역에 대한 이해의 신경망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깨달음은 하나의 새로운 신경망이 생성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것과 똑같은 메커니즘을 따른다.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은 디지털 적으로 탈 수 있음과 없음으로 명쾌하게 구분이 가능하다. 있음과 없음 사이의 아날로그적 구간이 없다. 자전거를 타는 비유를 약간 비틀면 깨달음은 기존의 정상적 자전거 말고, 핸들이 거꾸로 움직이는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자전거 타기는 생각의 내용에 기반한 신경망, 핸들이 거꾸로 된 자전거는 생각 아닌 것에 기반한 신경망과 같다.


신경망은 같은 구간을 반복적으로 걸어서 그 자리에 길이 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 과정이 지속될수록 그 길은 더욱 단단해지고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한 번 생긴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길에 의해 배제될 수 있을 뿐이다. 핸들이 거꾸로 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고, 기존의 정상적인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금연을 하게 되었다고 흡연하는 법을 모르게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다만 깨달음의 신경망은 깨달음 이전에 형성된 비효율적이고 부조리한 신경망을 대체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깨달음, 즉 자기해체 신경망은 생각이 아닌 미지에 기반하므로 기존의 자기강화적 신경망과 반대 방향이지만, 신경망이 강화되는 메커니즘은 기존의 자기강화적 메커니즘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시 말해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깊이 각인될수록 신경망의 회로가 두꺼워지고 단단해진다. 새로운 신경망의 강화는 뉴턴의 물리학 법칙이 노골적으로 적용되는 현상계에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힘'이란 생각의 내용과 동일시로 인한 괴로움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는 역량이다.


신경망과 자전거 타기 비유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바로 이 '힘' 때문이다. 깨달음에 대한 온갖 미신에 서 벗어나 앞서 설명한 깨달음의 정의에 따른다면 깨닫는다는 것은 생각 아닌 미지에 대한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므로 어렵지 않게 새로운 신경망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신경망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평생을 통해 형성되고 강화되어 온 힘이 센 고정관념의 신경망들과의 교란과 경합을 견뎌낼 수 있어야 비로소 그것들을 대체할 수 있으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알아차림'은 깨달음의 신경망을 강화할 수 있는 내가 아는 가장 효과적이고 훌륭한 방편 중 하나다. 처음엔 의도가 포함된 능동적 알아차림으로 시작하지만, 이 또한 신경망의 영역이므로 반복적으로 활용될수록 절차기억화되어 자동적으로 작용한다. 알아차리는 것에서 알아차려지는 것으로 전환이 된다. 이러한 알아차려짐에 의해 새로운 자기해체 신경망이 오래된 자기강화 신경망을 점진적으로 대체해 나아간다. 이것이 깨달음(頓悟) 이후 점수(漸修)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며, 성인(聖人)도 이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울타리 바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