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만에 살림 글을 챙겨 본다. 예전 같았다면 강박적 습관에 의해 규칙적으로 꾸역 꾸역 뭔가를 끌어내고 말았을 것이다. 불안장애 기전의 재발로 정신과에 내원한 것이 6월 말 정도인데, 꾸준히 약을 복용한 탓인지 아니면 무관해짐이 단단해진 탓인지, 또 아니면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나 그러한 것인지 수면장애와 간헐적 불안이 많이 줄어들었다. 성인이 되어 가장 낮은 체중을 찍었다가 두 달 사이 다시 7kg 이상이 늘어났다. 관계에 있어 예전과 큰 변화가 있다면 오랜 지인들과의 소통보다는 '깨달음' 공부를 하는 도반들과의 소통의 빈도가 훨씬 늘어났다는 것이다. 관계에 대한 불필요한 부채의식이 점점 줄어든 결과인 것 같다.
점수의 중요한 방향이 자연스러운 생명력의 흐름에 저항하는 불필요한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체득되면서 강박적이던 일상의 패턴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일 수는 있으나 생각이 현상계에서 행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소의 행위는 '알아차림'이며, 그러한 '알아차림'이 체득 됨으로써 생명력에 대한 저항이 최소화되며, 그러한 행위들이 현상계 내에서는 자연스러운 몸에 대한 섬김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주말 새벽 눈이 떠졌을 때 몸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고, 억지스레 뭔가를 하는 대신 좀 더 늦 잠을 자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한편 기존에 지어진 인과(일명 업보 또는 업장)에 밝아짐으로써 그러한 것들에 대해 애써 거스르거나 저항하지 않는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다. 소위 말해 내 깜냥과 분수를 넘어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오래 저항하지 않고 즉각적이고 신속한 수용을 하게 되었다. 가령 9월 중순 롯데월드 연간 이용권을 끊었는데, 9월과 10월 초 사이 주말과 연휴에 아이들과 5번을 다녀왔다. 인기 많은 놀이기구 앞에서 2시간 이상 줄을 서 보고,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북적거리는 어지러운 공간에서 6시간 이상을 머물고, 충분히 예측한 대로 입안이 헐 정도로 피곤에 절어 뻗는 일을 반복했다.
또한 소위 말하는 과잉함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지난해 초부터 6개월 이상을 매일 쉬지 않고 골프연습에 매진했던 때가 있었다. 동료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편이고, 배우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간 만큼 본전을 뽑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인과로 작년 8월 허리 디스크가 터졌고, 올 초부터 욱신거리던 왼쪽 어깨는 회전근개 손상이 오래 누적되어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3년째 고생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생긴 방아쇠 증후군은 작년에 수술 권유를 받았지만 몸에 칼 대기 싫어 스테로이드 주사로 때웠는데, 결국 재발하여 이틀 전 입원하여 생 살을 째고 인대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다.
환자복으로 환복을 하고 팔에 링거 주삿바늘을 꽂고 수액이 주입되는 순간 환자가 되는 플라시보와 드라마에서만 보던 조명이 뻔쩍이는 수술방에 들어가는 체험도 해보게 되었다. 수면 주사를 통해 순식간에 생각이 끊어지게 되었고, 잠에서 깨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의식이 돌아오는 체험을 했으며, 마취가 풀리지 않은 오른팔이 분명 내 몸에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감각한 통나무인 것 같은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오른팔을 쓰기 어려워지자 왼손으로 식사를 하고,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자발적으로 당하게 되는 낯선 체험들이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다.
점수(漸修)를 최근 내 경계로 다시 해석을 한다면 미신타파(迷信打破)가 아닐까 한다. 그토록 대단하고 거창할 것 같았던 깨달음의 경지와 깨달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릇된 신념과 기대가 점차적으로 소거되는 과정인 것 같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사회를 통해 이식받고, 세뇌된 온갖 관념들(주로 ~해야 한다,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생각으로 흐르고 있음)의 거품이 빠지는 과정인 것 같다.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런 보잘것없는 온갖 관념적 당위와 무관하게 생명력은 저절로 펼쳐진다. 투박한 결론이지만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최선은 다만 그런 줄을 아는 '알아차림' 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