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생각은 시작된다.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 오늘 할 일에 대한 계획, 지금의 느낌 등 온갖 생각들이 연상작용을 통해 쉬지 않고 줄줄이 이어진다. 다시 잠들 때까지 생각은 계속된다.
생각, 즉 자극에 대한 언어적 해석작용은 주어와 서술어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문장이 여러 개 모여 이야기를 이룬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틈이 있지만 인식하기 쉽지 않다. 그 틈을 들여다 본 적도, 봐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떤 계기에 의해 그 틈을 알게 된다. 생각 아닌 것을 생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해서, 즉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어서 일시적인 해프닝이라 여기며 스쳐지나가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고, 결코 없을 수 없는 그 앎을 담는 그릇이 수행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 그 작은 틈에 대한 알아차림(수행)의 반복을 통하여, 일시적인 해프닝이 확신으로 견고해진다. 여기서 확신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 검증한 의심할 여지 없는 명백함이다.
그릇에 담길 처음 한 방울이 중요하다. 그것이 처음이자 끝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틈에 대한 앎이 의식에 아주 강렬하게 새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내 경우 꾸벅꾸벅 졸다가 죽비소리에 놀라서 깨어나며 그 틈을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분명 그 체험이 내겐 최초의 질적 변화였다.
그 앎이 처음이자 끝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관성은 그 앎을 일시적 해프닝으로 퇴색시킨다. 최초의 그 앎이 견고한 그릇에 안전하게 담겨야 하는 이유다. 확신이 없으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확신이 생기려면 스스로 검증하여 명백해지는 수 밖에 없다.
주변의 화려한 무용담에 흔들리고, '완전한, 완벽한'이란 수식어에 현혹되어, 알아차림을 통해 생긴 일상 속 작은 놓여짐을 쉽게 흘려 보낸다. 일상을 완벽한 생각없음, 멸진의 상태로 사는 것은 불가능 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
일상의 작은 틈, 작은 놓여짐이 생각너머 드 넓은 실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면 그걸로 충분하다. 매일 떨어지는 한 방울의 낙숫물이 큰 바위에 구멍을 낸다. 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한 걸음씩 걸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 아닌 것에 조금씩 뿌리를 내린다.
2023년 2월 12일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