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슬리 ep12 : 다섯 번의 만남, 한 번의 대화 (3)
아마도 IMF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명동의 초입에 서있던 백화점 쁘렝땅이 문을 닫은 것은.
이름부터가 난해한 이 백화점은 건물의 색깔도 당시로서는 병원 건물에나 쓸 정도로 흔치 않은 (지금도 그런 것 같긴 하다) ‘올 화이트’였고, 그 안에 들어찬 물건들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프랑스에서 온 백화점이라는 사실은 다 크고서야 알게 되었고, 쁘렝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더더욱 몰랐지만 그곳에 고급스러운 ‘외제’ 물건이 많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쁘렝땅이 Printemps라는 철자를 가지고 있고, 프랑스어로 ‘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장국영 때문이었다. 이 백화점이 문을 닫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국영이 <쁘렝땅>이라는 앨범을 낸 것이다. 쁘렝땅, 망한 그 백화점?
가수 컴백 후 선보인 세 번째 앨범이었다. 전작인 광동어 앨범 <紅>에서 본격 어덜트 컨템퍼러리로의 전환을 시도하며 파격적인 비주얼들을 쏟아내더니, 이번에는 봄처럼 말랑말랑한 앨범을 들고 왔다. 그리고 그 말랑말랑한 앨범을 가지고 또다시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얄궂게도 98년의 나는 장국영 덕질을 그만두려는 노력을 한참 하고 있었다. 당시에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서 내 인생에도 그 그림자가 꽤 짙게 드리워졌던 때였다. 이제 나도 어엿한 성인으로서 밥값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는데, 그보다 더 크게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팬질과 먹고사는 문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었다.
아르바이트 과외선생을 그만두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려면 일단 장국영을 쫓아다니는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서른이 되어 잔치가 끝나자 지갑을 들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어느 시처럼, 나 역시 이제 철딱서니 없이 즐겁게 노닥거리는 ‘아이’ 혹은 ‘학생’ 으로서의 시간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도 지갑을 들고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러 나가야 한다고.
팬질도 결국은 취미인데, 그때의 나는 장국영을 취미라기보다는 ‘길티 플레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팬질을 하다 하다 아예 그에 대한 글까지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달콤하기 그지없는 길티 플레저를 멈추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한 행동은 수년간 모았던 아이템들을 하나씩 처분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훈장처럼 가지고 있는 한은 도저히 이 팬질을 끊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참 얄궂게도 나도 이제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장국영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던 그때, 장국영이 서울에 온 것이다. 한겨울처럼 추운 내 마음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 ‘봄’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홍보하러.
물론 이번에도 공항에 마중을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싶었고,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신 따위가 아니라 내 인생 전체가 걸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든 일정을 쫓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신사동의 한 극장에서 열렸던 팬미팅(그때는 팬미팅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무대인사 비슷한 제목이었던 것 같지만..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편의상 글에서는 팬미팅이라고 쓴다)에만 다녀왔다.
마음만은 이미 팬미팅 맨 앞줄에 가 있었지만 “장국영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라는 말을 되뇌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팬미팅에도 부러 늦장을 부려가며 도착해서 98년의 장국영은 다섯 번의 만남 중에서 가장 멀리서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콘서트에서 보았던 모습이 훨씬 더 가까웠을 정도로 멀고 먼 뒷자리에 앉아 그가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大家好(여러분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런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려가며 나도 “你好(안녕하세요)”라고 외친 것은 비밀이다.
'마지막 의리’로 팬미팅에 오기는 했다마는, 나는 팬질을 진짜로 그만두겠다는 굳은 결심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팬미팅이 끝나고 난 뒤 극장 근처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일본 팬을 만나 ‘거래’를 했다. 내가 십수 년간 모아 왔던 스크랩북 다섯 권을 모두 홀라당 팔아버린 것이다.
거금을 받고 팔았다면 돈 때문에 장국영을 팔아넘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서 헐값에 가까운 가격에 애지중지했던 스크랩북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는 자격증을 따겠다며 공인중개사 수험서를 샀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는 에피소드이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꽤나 의미 있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했듯 이 비장함이 무색하도록 나는 얼마 후에 다시 국영댁으로 컴백했다. 그리곤 서울과 홍콩에서 엄청나게 발품을 팔아서 구비했던 소장품 라인업이 듬성듬성 이빨 빠진 갈갈이처럼 망가졌다는 사실에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렇다고 피 같은 자료들을 팔아서 산 수험서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 것도 아니었다. 공인중개사는커녕 지금도 부동산 거래가 필요할 때면 등에서 땀부터 주룩주룩 흐른다. 그때 그 책은 오늘도 서재 한편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사람은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나쁜 기억들은 어딘가에 묻어 놓는다고 한다. 그곳이 해마이던가, 시냅스이던가. 나에게는 1998년이 그런 기억이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그냥 원래 하던 것만 성실히 했어도 충분했을 시기였는데, 누가 강요를 한 것도 아닌데도 좋아하는 것들과 내가 누릴 수도 있었던 것들을 지레 포기하고 온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국영을 보았던 기억들을 더듬고 더듬다가 마침내 1998년에 가 닿았을 때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세상에 장국영이 98년에도 한국엘 왔었구나, 내가 심지어 팬미팅 비슷한 곳에도 다녀왔었구나, 그래 거기서 스크랩북을 몽땅 다 팔았었지.
생각해보니 <Printemps> 앨범에는 내가 좋아하는 말랑말랑한 곡이 꽤 많은데도 이상하게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CD도 그랬고 스트리밍으로도 거의 듣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알았다. 그 앨범을 들으면 1998년의 그 암담한 기분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지나간 모든 기억을 다 또렷하게 지니고 살 수는 없지만, 그렇게 통째로 들어낸 것처럼 기억을 잊고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부러 걱정하고 부러 애태우고 부러 고민하던 당시의 내가 새삼 짠하면서도 대견하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그렇게 봄날 같은 시절에 너무 종종거리기만 한 것은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이내 황사가 와도, 미세먼지가 심해도 봄은 봄이라는데 생각이 닿는다. 그래, 나의 봄날은 그저 황사와 미세먼지가 심했을 뿐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나에게 봄은 없었거나, 봄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나의 봄날을 위로하며, 오늘 밤에는 자기 전에 <Printemps> 앨범을 정주행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