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心睡眠(무심수면) - 장국영, 인생 최고의 취향저격

나의 레슬리 ep3 : 내가 사랑한 가수 장국영 (2)

by 장지희

사실 나는 내가 이렇게 일평생을 홍콩스타의 팬으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국민학생 시절의 다른 친구들이 그러했듯 온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앞으로 나란히를 한 중국 귀신 강시가 등장하는 <영환도사> 시리즈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게 홍콩영화였다는 것은 다 크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의외로 홍콩에서 물 건너온 콘텐트들을 어릴 때부터 꽤 꾸준히 접하고 있었다.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할 때마다 엄마가 꼬박꼬박 챙겨본 덕분에 영화 <최가박당>도 시리즈별로 거의 다 보았고(그래서 훗날 <최가박당> 시리즈의 최종편이라 할 수 있는 5탄에 장국영이 출연한 것을 알았을 때 또 괜히 혼자 감개무량해했었다), 방학이면 동갑내기 남자 사촌과 함께 성룡의 영화도 못지않게 많이 보았다.

그리고 아주 어릴 때 아빠가 베타 테이프로 돌려보곤 했던 <외팔이 왕우>도 홍콩영화였다.

그래서 장국영이 아니었어도 어쩌면 나는 언젠가는 결국 홍콩영화의 팬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음악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강시 영화 주제곡 같은 것은 들어본 기억조차 없고, <최가박당> 주제곡은 재미있는 멜로디 때문에 몇 번 흥얼거려본 적은 있지만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성룡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장국영의 음악은 처음 듣는 순간, 온몸에서 간질간질한 전율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웃기고 재미있어서 빵 터지는 웃음이 아니고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줄줄 새는 웃음이었는데 처음 경험해보는 기분에 좋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첫눈에 반한다는 표현이 어떤 느낌인지 장국영이 부른 노래를 들으면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문제의 노래는 바로 <無心睡眠 (무심수면/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憂鬱奔向冷的天 撞落每點小雨點

우울함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질주해 부딪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면


張開口似救生圈 實驗雨的酸與甜

마치 구명줄을 잡는 것처럼 입을 열어, 비의 맛을 느껴보네


捲起心愛的香煙 弄著腳底的軟墊

좋아하는 담배를 말아 피우고 발치의 쿠션을 가지고 놀아보아도


酒醉與心碎心碎 溝起污煙一片

술에 취해 산산이 부서진 마음은 뒤엉켜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지


WHOO-Oh-O 無心睡眠

오- 잠 못 이루는 밤


WHOO-Oh-O 腦交戰

오- 머릿속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 같아


踏著腳在懷念 昨天的妳

아무리 애를 써도 잊혀지지 않는 어제의 너


夜是滲著前事 全揮不去

밤은 과거를 관통해 지나갔지만, 모든 것을 떨쳐낼 수는 없어


若是妳在明日 能得一見

만약에 당신을 내일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면


就讓我在懷內 重得溫暖

나에게 다시 따뜻하게 대해줄 수는 없을까


憂鬱奔向冷的天 活在我的心裡邊

차가운 하늘을 향해 달려가는 우울함은 내 마음속에 살고 있지


始終只有妳方向 令逝去的心再甜

내가 달콤한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야



https://youtu.be/c2HCLzzDlQ4

나의 의문 : 장국영이 밤잠 설쳐가며 찾아 헤매는 그녀는 왜 호피 타이즈를 입은 에어로빅 걸이어야만 했을까 ㅎㅎㅎ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내가 태어난 뒤 딱 1년 후에 태어나 막내 이모에게 해마다 색깔만 다른 생일선물을 함께 받곤 했던 외사촌 동생의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에 살던 작은 이모네가 강남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예전에는 거의 매일 보았던 동생을 꽤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다. 만날 때마다 늘 그러하듯 우리는 동생 방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이불까지 뒤집어쓰고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속닥속닥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한참 수다를 떨던 동생이 새로 산 워크맨을 보여주겠다며 이 노래를 틀었다. 장국영을 좋아했지만 나는 아직 국내에 음반이 나왔는지도 모르고 있을 때였다. 두근두근 기대를 품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박남정과 소방차의 노래를 좋아했던 당시의 내게 이 노래는 그저 쇼크였다. 장국영은 박남정과도 소방차와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이 “왠닐이니 파리똥”이라고 불렀던 올리비아 뉴튼 존이나 “삐레”라고 샤우팅 하는 마이클 잭슨과도 달랐다. 알아듣지도 못할 생경한 발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이렇게나 취향을 정통으로 저격해버릴 줄이야.



흔히 가수의 일생이 노래를 따라간다는 속설이 있다. 슬픈 내용의 노래를 발표한 가수들이 수백수천 번 그 슬픈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다가 결국 스스로의 삶도 슬퍼진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노래는 가수가 아닌 내 일상을 바꿔놓았다. 노래 제목처럼 밤잠을 설쳐가며 이 노래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즈음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잘 때 머리맡에 AFKN을 틀어 놓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면 잠자는 동안 무의식이 반복해서 영어를 듣게 되어서 영어를 잘하게 된다고 해서 너나 할 것 없이 AKFN을 틀어놓고 잘 때, 나는 이 노래를 앞뒤로 빽빽하게 복사한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을 잤다. 반복해서 듣다 보면 무의식 중에 이 노래 가사를 알아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꿈을 품고. 덕분에 내 삶을 통틀어서 이 노래처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노래는 없는 것 같다.



취향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주파수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가진 감성과 동일한 주파수를 가진 무언가를 일컬어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그 날 나는 내가 가진 주파수를 정확히 관통하는 노래를 들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난생처음으로 알아차린 날이라 할 수도 있겠다. 비록 취향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나이였고 그저 들으니 소름 돋게 좋았던 기억뿐이지만.


가수 장국영에게 입덕 하게 한 공로 덕분인지 <무심수면>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최애곡이었다. 이 곡은 내가 처음으로 샀던 장국영의 앨범, 국내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의 A면 첫 번째 곡이었다.


최애곡답게 이 곡만 듣고 또 듣기 위해 반복해서 테이프를 앞으로 감았다 재생했다를 반복하다 보면 늘 테이프가 늘어나서 “오오오오- 모우쌈쏘이민(무심수면)”이라는 후렴구 부분이 마치 슬로모션 인양 “우어어어어어어어- 모오오 우우우 싸아아암 쑤어어어어이 미이이인”으로 들리곤 했다. 그래서 CD플레이어를 장만하고서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깨끗한 원곡 그대로의 <무심수면>이 재생되는 것을 보고서 새삼 전율을 느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최근까지도 스트리밍으로 즐겨 듣는 곡이지만, 가끔은 언제 어떻게 들어도 늘어짐 없이 또렷하게 들리는 음질이 아쉬울 때가 있기도 하다. 형편없이 늘어나는 음악 자체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테이프가 늘어날까 걱정하면서도 밤새 한 곡만 반복해서 들었던 그때의 설렘이 그리운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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