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닌종정(為您鍾情) : 장국영이 운영했던 카페

나의 레슬리 ep36 : 장국영과 함께 걸어온 시간들 (7)

by 장지희

지난주 만우절을 지나며 홍콩에 대한 글을 연달아 세 편이나 발행했더니,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홍콩이 지금은 갈 수도 없고,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곳이 되어버린 터라 그 여운이 더 오래갔던 것 같다. 덕분에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꽤 여러 날 홍콩에서의 추억과 음식들을 반추했었다. 그렇게 하나씩 떠올려가다 보니 자연스레 기억은 한 찻집에 가 닿았다.


맞다. 예상하시는 바로 거기다.

코즈웨이베이에 있던 <為您鍾情(위닌종정)>.

레슬리가 운영하던 카페.



wnzq.jpg '위닌종정'의 내부. 지금 봐도 나쁘지 않지만, 처음 찾았던 1996년 당시엔 무척 세련된 인테리어였다.



<위닌종정>은 고별 콘서트에서 언젠가 밀크티와 커피를 파는 카페를 열 테니 차 한 잔 하러 오라던 그가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곳이었다. 고별 콘서트의 티켓을 가지고 오면 차를 무료로 주겠다는 약속 또한 성실히 지켜낸 곳이기도 하다.

"당신에게 사랑을 다 하겠다"는 내용의 대표곡이자 프러포즈 송인 <為妳鍾情(위니종정)>에서 이름을 땄는데, 노래 제목 중 '妳(니 / 여자를 의미하는 당신)'를 존칭인 '您(닌)'으로 바꿨다. 아마도 팬들을 칭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곳은 레슬리가 아비정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Queen's Cafe (皇后飯店/황후반점)'의 사장과 손잡고 동업으로 문을 연 곳이다. 수년간 꽤 장사도 잘 되었던 것으로 아는데, 아쉽게도 운영방식에 대한 이견 때문에 결국 레슬리는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된다.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아예 폐업하는 것보다는 동업을 정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하지만 더 이상 레슬리의 카페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손님이 뜸해지다가 결국 'Queen's Cafe'의 여러 지점 중 하나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wnzq2.jpg 사진이 너무 작지만, 입구 옆의 검은 점 네 개가 為您鍾情 간판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케이크 진열대.


나는 이곳에 1996년, 1998년, 2000년 이렇게 세 번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코즈웨이베이의 타임스퀘어 근처에 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지 정확한 위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새삼 어디에 있었나 궁금해서 홍콩의 맛집 앱을 돌려보니, 어머나 이게 이 자리였어? 하는 곳에 있다.


그동안 내가 기억했던 것은 그저 하얀색 벽에 자그맣게 양각으로 덧붙여진 <위닌종정>이라는 네 글자가 간판의 전부였다는 것,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웨인스 코팅으로 꾸며진 흰색 벽을 보며 인테리어도 참 장국영 답게 단아하고 고급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화장실 입구에 걸려있던 <신상해탄>의 포스터 앞에서 찍었던 스무 살의 천진난만 내 얼굴.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기억이 딱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찾아가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도 마시고 치즈 케이크 비슷한 것도 먹었던 것 같은데, 디테일은 몽땅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벼르고 별러서 찾아간 그 중요한 순간을 어쩜 이렇게도 홀라당 잊은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어이없지만, 그건 아마도 그때 내가 차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흥분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위닌종정>은 언제 가도 늘 팬들로 북적였던 곳이지만 고급진 하얀색 벽에 걸린 레슬리의 사진을 제외하면 이 곳의 사장이 장국영이라는 티가 별로 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저 장국영을 좋아하는 팬이 사진 몇 점 걸어둔 깔끔한 카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혹시나 장부 정산이나 수금을 하러 온 레슬리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우연히 팬들과 식당에서 마주치면 슬그머니 밥값을 결제해주기도 했다는 후기를 읽고 나서는 무려 레슬리에게 차를 얻어마시는 '원대한' 상상을 펼치곤 했다. 그래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을 때는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쭈뼛거리며 주위를 살피곤 했다. 함께 했던 동행들이 내가 왜 자꾸만 두리번대는지 궁금해할 정도로. 물론 모두의 예상처럼 그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IMG_2468.PNG 폐업한 지 오래지만, 놀랍게도 홍콩의 맛집 서비스 'Open Rice'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레슬리가 <위닌종정>을 얼마나 찾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낯선 홍콩의 땅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직접 이름을 붙이고 꾸민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참 근사한 기분이 들게 했다.

아마도 K-POP을 사랑하는 전 세계의 팬들이 서울을 찾아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운영하는 카페며 음식점들을 찾아가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내가 마시는 이 커피가 그 사람이 직접 타 준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알지만, 이렇게라도 좋아하는 사람의 감성과 경험을 공감하고픈 마음이랄까.


그래서 비슷한 이유로 스타들이 평소에 즐겼다는 맛집도 팬들의 성지순례 장소가 되곤 한다. 장국영이 생전에 사랑했던 몇몇 곳도 이미 성지의 반열에 올랐다.


가족들과 함께 종종 찾았다는 해피밸리의 딤섬집 ‘예만방’(국내 포털에 검색해보면 아예 ‘장국영 단골집’이라고 불리고 있다. 딤섬이 맛있지만 막상 가자고 들면 교통편이 좋지는 않다), 술이 셌다는 그가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였다는 일본식 선술집 ‘모정’, 장국영이 “나도 비싸서 자주는 못 간다”라고 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한 광동요리 전문점 ‘폭람문(福臨門)’, 똠얌꿍을 먹으러 자주 찾았다는 리펄스베이의 ‘Spices’, 로비의 화려한 천장의 디자인을 누구보다 사랑했다던 페닌슐라 호텔의 ‘Verandah’... 모든 곳을 다 가보진 못했지만, 가게 되면 그가 좋아했다던 메뉴 하나쯤은 주문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그조차도 언젠가부터는 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한 10여 년 전쯤의 일일 것이다. 똠얌꿍에 한참 빠져있을 때, 레슬리가 좋아했던 똠얌꿍을 맛보겠다며 리펄스베이를 부러 찾아간 적이 있었다. 친구와 리펄스베이 해변에서 한참을 노닥거리다가 식당으로 들어가 각자 메뉴 하나씩 주문하고 거기에 칵테일도 한잔씩 걸쳤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장소를 옮기려고 계산을 요청했더니 하루 식비로 예정해둔 금액을 훌쩍 넘어서는 계산서를 받았었다.

맛도 있었고, 기분도 그럴싸했으나.. 잠깐 기분을 낸 것 치고는 출혈이 너무 컸다. 덕분에 그 이후 식사가 부실해졌던 기억이 난다. 함께 갔던 친구는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도 그 뒤였을 것이다. 내가 '장국영의 단골집'이라 불리는 곳들을 부러 찾아가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당시와 지금의 지갑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그곳에 간다면 그렇게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엔 왠지 장국영 따라잡기에 뱁새가 황새 쫓으려다 난감해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더랬다.


3f2900049704c6663741.jpeg 영화 <유성어>를 촬영할 당시에 '카우키'를 찾았다는 레슬리 (저 국수 맛있는데, 츄릅)


하지만 레슬리의 단골집 찾기를 멈추고 나니, 그 다음에는 의외의 수확들을 찾게 되었다. 양조위의 단골집으로 알려진 소고기 카레 국숫집인 카우키(Kau Kee/九記牛腩)에서 찍은 사진도 발견하게 되고, 홍콩에 가면 한 번 이상은 꼭 먹게 되는 음식인 양주식 볶음밥을 먹는 레슬리 사진을 보며 괜히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머! 오빠도 양주 볶음밥 좋아하는구나?) 마카오에 가서 우연히 찾은 육포 집에서는 레슬리가 다녀갔다는 인증사진을 발견하기도 했다.


결국 온 홍콩이 레슬리의 흔적 투성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나는 홍콩이 더욱 더 좋아졌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인물이 사랑했던 홍콩,

그리고 지금의 내가 한국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곳 홍콩.


어서 이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서 다시 홍콩의 거리를 자유롭게 걷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코로나도, 정치적인 상황도.




덧붙이는 말.

이 글을 다듬는데, 랜덤 재생을 걸어둔 애플뮤직에서 신기하게도 <為妳鍾情>이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노래를 다 듣고서는 생각했다.

이제 홍콩 이야기는 그만 해야겠다고. 4월 증후군에서 어서 벗어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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