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슬리 ep16 : 다섯 번의 만남, 한 번의 대화 (4-2)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모니카의 짱께 마을>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니카예요.
원래는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이지만 오늘 인터뷰는 특별히 비디오 클립으로 제작할 거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나는 척 하고 내 손을 내밀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레슬리는 씩 웃으며 내 손을 맞잡고는 물어왔다.
오 마이 갓.
엄마, 아무래도 나 오늘 계를 탄 것 같아요!
요즘 말하는 성덕(성공한 덕후)이 바로 나였다.
속으로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너무 신나서 어깨춤이 절로 나왔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답했다.
“네 맞아요. 10 년 넘게 좋아한 엄청난 팬이에요. 하지만 모니카는 사실 세례명이에요”
그는 이렇게 답한 팬은 처음이었는지, 가톨릭 네임 중에 모니카라는 이름이 있었냐며 흥미로워했다. 덕분에 통성명을 하고 얼결에 이름의 기원까지 열심히 설명해주게 되었다. 중세시대 철학가와 성녀 모니카 이야기를 꺼낸 모니카는 아마 레슬리도 이 날 처음 만나보았을 것이다.
그러자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프로듀서가 나서서 카메라 앵글을 잡고는 나와 장국영의 자리를 정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는 장국영이 앉은 소파의 낮은 팔걸이에 걸터앉았다가, 소파 옆에 다른 의자를 놓고 그와 기역자로 앉았다가 다음엔 나란히 앉았다가.. 결국 소파 옆에 다른 의자를 놓고 앉는 것으로 구도가 확정되었다. 내가 자리를 옮겨 앉을 때마다 카메라와 내 몸의 위치에 맞춰서 장국영도 계속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맙소사, 이게 현실이라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애써 침착하게 자리를 잡고 나니 함께 온 조연출이 내게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건넸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큐에 맞춰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이 레슬리,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이 모니카, 만나서 반가워요”
첫 질문을 던지고 속으로 생각보다 매끄럽게 진행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맞은편에 앉은 프로듀서가 팔로 다급하게 엑스자를 그려 보인다. 장국영에게 양해를 구하고 물어보니... 내가 멘붕 상태이긴 했던 모양이다. 마이크도 켜지 않고 신나게 인터뷰를 시작한 것이다.
결국 마이크를 켜고 다시 촬영을 준비하는데 장국영이 뭐가 문제냐고 물어왔다.
“제가 마이크 켜는걸 깜짝해서요”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카메라에 문제가 생겼다”라는 말로 어물쩍 넘겼다. 눈치를 살피니 다행히 장국영은 내 말을 듣고는 그럴 수 있지, 라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하지만 촬영 스태프와 내가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으로 이미 그는 에러가 난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진행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뻥쳐서 미안해요, 국팔씨)
다행히 다시 한번 “하이 레슬리”로 시작해 그 뒤로 이어진 인터뷰는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그의 새 영화에 대해 묻고, 상대역인 일본인 여배우와의 연기에 대해 묻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가 감독 데뷔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계획을 밝혔을 때 나는 진심 오조 오만 퍼센트를 담아 그에게 말했다.
“혹시 새 영화에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가 필요하다면 나에게 연락 주세요”라고.
그 말에 그는 하핫,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나 세상에, 귀엽대 내가.
장국영이.
장국영이 나보고 귀엽다고 했어!
이 날 인터뷰를 하러 가는 대신에 복권을 샀다면 1 등에 당첨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10 년 간의 오매불망 바라 온 장국영과 직접 대화한 것도 모자라서 그에게 귀엽다는 이야기를 듣다니.
물론 귀엽다는 말이 아름답다, 예쁘다 라는 말을 쓰기 애매할 때 꺼내는 표현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저 “하하 농담도 참”하며 웃어넘겨도 되었을 농담에 굳이 “아니야 너는 귀여워”라고 말해준 것이 그렇게 스윗할 수가 없었다. 온 마음이 액체로 녹아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달까.
훗날 걸그룹 f(x)가 부른 <아이스크림>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날의 나를 떠올렸다. 사실 나의 정체는 아이스크림이지만, 네 옆에만 있으면 나도 모르게 사르르륵 녹아내려서 밀크쉐이크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귀여운 고백. 그날 장국영 옆의 내가 딱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직장에서 나와 딱 스무 살 차이가 나는 막내를 팀원으로 맞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날 레슬리가 나에게 했던 귀엽다는 말이 립서비스가 아닌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꼬꼬마가 짐짓 어른인 척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귀여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보다 스물 한살이 많은 마흔네 살의 장국영 눈에, 팬심으로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터뷰를 이어갔던 꼬꼬마 인터뷰어가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마이크를 켜는 것을 깜빡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무사히 인터뷰가 끝났다. 나를 끝으로 개별 인터뷰는 마무리가 되었고, 곧바로 이어서 잡지의 사진 촬영이 있다고 했다. 카메라가 물려지고 새로 들어오는 복잡한 현장의 한 켠에서 나는 그와 다시 한번 악수를 하고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사실 인터뷰가 확정되었을 때부터 가장 깊게 고민한 것은 ‘과연 어떤 선물을 전할 것인가’였다. 사실 처음부터 아이템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책이었다. 그것도 영어로 된 한국소설. 하지만 지금처럼 한국문학의 번역이 왕성하지 않을 때라 선택에 한계가 있었다. 정말로 선물하고 싶은 작품은 번역본이 없고, 번역본 중에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는 딜레마. 결국 나는 서울시내의 규모 있는 서점들을 샅샅이 뒤진 끝에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택했다.
물론 좋은 작품이지만 사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영문소설을 선물했을 텐데, 왜 그때는 꼭 한국소설이어야만 한다고 선을 그었던지.
하지만 그는 한국소설이라며 책을 내미는 내가 신기했는지 책에 매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곤 이 <Our Twistted Hero>라는 책이 무슨 내용을 담은 책인지를 물었다.
그 질문에 유려하게 답을 할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겠으나, 아쉽게도 책의 내용을 묻는 것은 나의 질문지에 미리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살짝 당황한 채로 2-3 초의 시간이 흐른 뒤 한국의 60-70 년대의 이야기라고 얼버무렸다. 좀 더 근사하게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 후로 어딘가에서 장국영이 책을 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는 혹시 그게 내가 준 책이 아닐까 헛된 기대를 품곤 했다. 한국 일정 직후에 떠난 여행에서 기차를 타며 영어로 된 책을 읽었다는 소식에 설마 하며 흥분했지만 아쉽게도 인증샷은 없었다.
그리고 이 날의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그에게 두 가지를 꼭 물어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만난 모니카라는 인터뷰어를 기억하는지. 그리고 그 인터뷰어가 주었던 책을 읽어보았는지... 하지만 이 질문은 결국 내 마음속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선물 증정에 기념 촬영까지 마치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음 일정의 스태프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조용히 물러나온 다음 내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에 그랬듯 먼발치에서 그런 그를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더는 머무르기 힘들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1 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촬영 결과가 만족스러웠는지 미적대는 나를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함께 빠져나온 프로듀서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를 따라 함께 인터뷰 장소에 갔던 선희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수미쌍관인가 싶을 정도로 인터뷰 직전의 상황을 그대로 베껴놓은 듯, 나를 제외한 우리 팀 모두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나는 어째 푸스스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접신을 마치고 나면 이런 기분이려나.
손발이 덜덜 떨리고, 내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나온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장국영을 만나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하고 대화를 나눴는데, 그것 모두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몸에 들어와서 한 행동들 같았다. 어떻게 그 앞에서 떨지도 않고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불가였다. 내가 불과 5 분 전에 장국영과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하고 다정하게 팔짱까지 끼고 사진을 찍었다고?
마치 5 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나니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계속 그대로 나인데,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가 그것을 벗고 맨몸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유리구두를 벗고 재투성이로 돌아갔을 때의 신데렐라가 이란 마음이었으려나.
하지만 신데렐라와는 달리, 내게는 유리구두를 들고 나를 찾아온 왕자님이 없었다.
그저 훈장처럼 남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그 순간들을 질리도록 회고하는 것 밖에는 다른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매우 아쉬운 점이 있는데 사진을 내 것이 아닌 선희언니의 카메라로 촬영한 탓에 사진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필름이 나에게 없다는 것과 인터뷰 영상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분실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겠지만, 이사를 하다가 박스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통에 그 안에
담긴 수많은 팬질의 결과물들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30 년 팬질의 역사에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어쨌든 언제 누구에게 설명해도 늘 신나고 흥분되는 짧은 15 분간의 만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지금도 역시 여기까지 쓰는데 문득 내 심장박동이 빨라진 것을 느낀다. 어느새 20 년 전의 일이 되었는데도 나는 이 날의 일을 이야기할 때면 매번 이렇게 흥분을 하곤 한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장국영과 나란히 앉았던 소파의 모양과 내 등 뒤로 펼쳐져있던 서울시내의 풍경, 장국영이 마시던 물 잔의 모양, 통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햇빛 같은 것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나를 “모니카아-“하며 다정하게 불러주었던 레슬리의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아마도 그 15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의 레슬리>를 연재하면서 선희언니에게 다량의 비디오테이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레슬리와 나와의 인터뷰 영상 백업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백업본을 입수한 후 신나게 디지털 변환을 시도했으나, 안타깝게도 테이프가 훼손되었다는 답을 들었다. 위에 첨부된 5초짜리 영상과 함께 들려온 비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오늘, 변환 가능한 부분만 살려서 이어붙이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영상을 부분적으로 전달받아 보았는데, 10년도 더 지나서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상은 신기하고도 새로웠다. 20년 전의 어린 나와 시종일관 유쾌한 레슬리가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라니!
이 글의 커버사진도 오늘 공유받은 영상에서 캡쳐한 것인데..
세상에, 레슬리가 날 보고 저렇게 웃다니 새삼 감격해버렸다. ㅜㅜ
언젠가 이 영상도 공유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