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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Oct 24. 2019

偶然(우연) - 장국영과 세 여자의 80년대 막장 멜로

나의 레슬리 ep11 : 내가 사랑한 배우 장국영 (1)

장국영과 왕조현, 매염방, 엽동이라는 홍콩영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함께 연기한 영화가 있다. 레슬리가 무려 세 여인과 차례로 사랑을 나누는 엄청난 작품인데,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중학교 1학년 때에 학교 강당에서 보았다. 그것도 학교에서 주관한 단체관람으로. 극장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어쨌거나 내가 난생처음 대형 스크린으로 본 장국영의 영화였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컨베이어 벨트처럼 이어져있는 곳이었다. 근방에 사는 여자아이의 8할이 다니는 학교였고, 그 여자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중고등학교 6년간 매년 교실의 층만 바꿔가며 한 해 한 해 성장했다.


그곳에 입성한 첫 해에 학교에서는 전교생을 모아 영화 단체관람을 했는데, 그 영화가 하필 장국영이 출연하는 <우연>이었다. 당시에 이미 장국영의 팬이었던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장국영의 영화인 것만으로도 황송한데 심지어 극장에서 상영된 지 얼마 안 된 작품이라고 했다. 그것은 비디오테이프가 출시되기도 전의 아주 따끈따끈한 영화라는 의미였다.


비디오테이프의 표지 사진. 때는 1990년, 무려 허리우드 극장 개봉작이시다.


영화 관람은 3학년부터 학년별로 3일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덕분에 하루가 지날 때마다 먼저 영화를 본 2-3 학년 선배들이 있는 아래층에서 온갖 감상평이 들려왔다.

장국영이 역시 죽이게 멋있다더라, 

아니다 얼간이 같은 역할이라더라, 

아니다 세상 둘도 없을 나쁜 놈이라더라.. 

감상평이 다양해질수록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마치 소풍날을 기다리듯 영화 관람일을 손꼽아 기다린 끝에 마침내 디데이, 나는 친구들과 제일 먼저 강당이 있는 5 층까지 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의자도 없는 강당 바닥에 척하고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다. 스크린이 정면으로 보이는 나름 명당자리였다. 그리고 이내 강당이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꽤 바빴다. 좁은 강당에 구겨 앉느라 금세 다리가 저려서 우리는 서로의 종아리를 번갈아 주물러주었다. 그러다가 키스신이라도 나오면 경쟁적으로 꺄악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곤 술 취한 장국영이 프랑스 아줌마에게 엉덩이를 대차게 얻어맞는 장면에서는 다 같이 와하하 신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다가 베드신에 흥분해서 무릎을 세우고 일어난 앞자리 친구에게는 자리에 앉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서도 등 뒤로는 선생님 몰래 가지고 올라온 초콜릿을 까서 한 조각 씩 돌려먹었다. 물론 당연히 투유 초콜릿이었다.


참으로 심란한 한국판 극장용 포스터. 어마어마한 카피에 현웃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했다. 홍콩 최고의 인기가수인 루이(장국영)가 술김에 자신의 백업댄서인 아니타(매염방)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를 자신의 콘서트 무대에 세우며 가수로 데뷔시킨다. 하룻밤 사이에 신데렐라가 된 아니타는 루이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의 마음은 자동차 접촉사고로 만난 묘령의 여인 줄리아(왕조현)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줄리아와의 꿈같은 데이트를 즐기며 사랑에 빠진 루이, 하지만 그녀는 알고 보니 아버지의 연인이었다. 곧 새어머니가 될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깊이 사랑한 여인이 아버지의 연인임을 알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떠난 루이, 호텔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셔대는 그를 보다 못해 홍콩에서는 돈줄을 끊어버린다. 잘 나가던 인기스타에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그는 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어느 밤 베트남전을 피해 파리로 피난 온 유시(玉詩/엽동)를 만난다.

그녀의 도움으로 레스토랑에서 서버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루이. 둘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져 언약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어 아이를 임신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다. 


유시는 베트남을 탈출하던 당시 맞았던 총알이 몸속에 박혀있어 아이를 낳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시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 고집하고, 아이가 커갈수록 병색이 짙어지는 유시를 위해 루이는 거리에서 버스킹을 시작한다. 그리고 파리의 거리에서 자신의 히트곡을 신청받아 부르다 목이 메인 그의 앞에 아니타가 나타난다.



이 그림은 또 누구의 작품인지.. 주인공들의 머리카락은 모두 금발인데, 눈썹만은 숯덩이인 기묘한 모습이다.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보자면 천방지축 인기가수 루이가 세 여자의 사랑을 거치며 성숙한 인간이 되어 다시 무대에 서는 성장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솔직한 마음은 2019 년의 한국 아침드라마 소재로 재활용해도 충분할 정도로 여러 막장 요소를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그저 장국영의 영화라는데 혹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영화를 택한 선생님들이 제정신이었나 싶다.


근 30년 전에 중학생들에게 술김에 원나잇을 하고, 아버지의 연인과 바닷가에서 ‘나 잡아봐라’와 키스신을 시전 하는가 하면, 급기야 약소하게나마 베드신도 등장을 하는 영화를 보여줬다니! 거기에 한 남자와 세 여자를 둘러싼 사각관계를!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결국 아내를 잃고 홍콩으로 돌아온 루이는 아니타의 콘서트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무대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함께 춤춰요>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 영화 대체 뭐지? 슬픔을 댄스로 승화했다는 것인가?


나중에야 듣게 된 이야기지만 ‘요새 인기 많은’ 홍콩배우 장국영이 나온다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영화를 택한 학생 주임 선생님이 교장선생님에게 된통 깨졌다고 한다. <우연>이라는 제목이 사춘기 소녀들의 감성을 저격할 것이라고 기대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경기도 오산이었다. (사족이지만, 이 선생님은 이듬해 단체 관람에서는 매우 절치부심하셨다. 심혈을 기울여 후보작을 고르고, 모든 작품을 직접 감상한 다음에 <시네마 천국>을 선택했고, 결국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결국 루이는 아내를 잃고 홍콩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장국영의 꽤 진한 키스신에 가슴이 콩닥거렸던 시절을 지나 다 크고 나서 중국어 자막으로 더듬더듬 다시 본 <우연>은 생각보다 더 재밌는 작품이었다.


일단은 등장인물의 출신이 무척 버라이어티 하다. 루이의 백업댄서이자 첫 로맨스의 주인공인 아니타는 알고 보니 문화 대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 (당시에는 중공이었던) 중국 예술가의 딸이었다. 아버지의 연인인 줄리아는 독일의 유명 컴퓨터 회사 창업자의 딸이고, 루이의 아내였던 유시는 베트남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이주한 난민이다. 세상에, 막장 안에 아시아의 굵직한 역사까지 담아낸 셈이다. 

아예 ‘창문을 넘어 도망친 인기가수 루이’라고 부제를 붙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물론 베트남 사람인 유시가 왜 이렇게 광동어에 유창했는지는 끝끝내 풀리지 않은 의문이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극 중 가수로 분한 장국영의 1985 년 콘서트 장면을 대놓고 사용한 덕분에 당시 아이돌 가수 장국영의 무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예 영화의 첫 장면부터 홍함 체육관에서 시작되어 콘서트의 히트곡 메들리로 이어진다. 

100% 콘서트의 장면만 사용된 것은 아니고 따로 촬영된 영상과 콘서트 장면이 정신없이 패치워크 되지만 사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1985 년의 장국영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영화에서 볼 수 있는데.


사진 속 장소가 바로 현재 '스타의 거리'이다.


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촬영 장소이다. 그 당시에는 장국영을 보느라 홀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영화에는 파리의 가을 풍경이 꽤 아름답게 펼쳐진다. 1985 년 10 월에 촬영을 했다고 하는데, 파리라면 응당 등장해야 할 에펠탑은 물론이고 단풍이 물든 소박한 거리도 무척 아름답다. 


그뿐인가. 30여 년 전의 홍콩도 물론 등장한다. 특히 아니타와 루이가 함께 걸었던 30여 년 전 스타의 거리도 꽤 낯설다.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관광지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침사추이 산책로(Tsim Sha Tsui Promenade)’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불렸던 곳인데, 영화 속에서는 이곳에서 무려 낚시를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잠깐만, 낚시라고?)

장국영과 매염방이 스타의 거리를 나란히 걷는 장면을 볼 때마다 참 복잡한 마음이 든다. 저 두 사람은 세월이 흘러 그 자리에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 거리가 조성되는 바람에 자필 사인도 손바닥 프린팅도 없이 이름만 덩그러니 새겨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나면 늘 입맛이 씁쓸해지지만, 그럴 땐 다시 흥겹게 무대 위에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장국영과 매염방을 들여다본다. 

젊고 아름다운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나도 강당에서 꺄악 소리를 지르는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영화 <우연>의 최대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예상치 못한 막장 스토리에 직장상사에게 된통 깨져서 괴로우셨겠지만 <우연>을 골라주었던 그 시절 학생주임 선생님의 ‘우연한’ 선택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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