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사해 - 힘을 뺀 유쾌한 장국영을 만나다

나의 레슬리 ep18 : 내가 사랑한 배우 장국영 (3)

by 장지희

장국영과 주윤발, 그리고 종초홍.

홍콩영화의 황금기를 함께 보낸 세 사람은 절친한 사이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장국영에게는 이들 외에도 수많은 연예인 친구들이 있다.


양조위의 아내이자 <아비정전>에서 아비를 따라 필리핀까지 쫓아간 댄서 염홍영(혹은 미미, 또는 루루)을 연기했던 유가령은 그의 마작 친구로 유명하다. 임청하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키우며 사랑했던 애완견 빙고를 선물한 절친이고, 홍콩 사람들에게 發哥(발형 / 광동어로는 팟꼬 정도로 발음한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주윤발도 그를 깊이 아낀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처럼 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영화 속에서의 장국영은 참 편안해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편안해 보이는 작품인 <종횡사해>는 장국영이 다른 주연배우인 주윤발, 종초홍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은퇴를 앞둔 상태임에도 촬영을 감행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왠지 실제로도 저렇게 삼남매처럼 투닥거릴 것 같은 세 사람.


<종횡사해>는 잘 알려진대로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세 남녀가 명화를 놓고 벌이는 미술품 도난극을 그린 작품이다. 사실 줄거리만 보면 굉장히 심각한 내용일 듯하지만 실제로는 코미디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유쾌한 영화다. 그 유쾌함은 연기와 연출에서 온 것도 있겠지만 주윤발이 가진 특유의 유머 코드와 세 사람의 절친함에서 오는 편안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세 사람이 빨간색 오픈카를 타고 니스 해변을 달리던 중 주윤발이 차를 세우고는 해변을 향해 달려가며 “청하!” “려군!”하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영문을 묻는 장국영과 종초홍에게 “이 해변에서 임청하와 등려군이 일광욕을 한대. 지금 있는지 보려고 불러봤어”하며 실없는 소리를 한다. 쯧쯧, 하는 표정을 짓는 나머지 둘. 이렇게 주윤발이 시치미 뚝 떼고 실없는 농담을 하면 장국영과 종초홍이 함께 마치 또 시작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저것이 정말 대본이었을까 싶다. 분명 영화인데도 왠지 그저 영화 같지만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와인잔과 함께 선보이는 장국영과 주윤발의 몸개그씬


그런 편안함이 드러나서일까, 내가 좋아하는 장국영의 영화를 꼽을 때 <종횡사해>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영화 전체를 끌고 가야 한다는 부담 없이 오랜 절친들과 즐기듯이 연기하는 장국영의 모습이 가볍고도 편안해 보인다. 그리고 심각한 내용이 없어서 언제든 웃으며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리고 장국영이 검은 턱시도를 차려입고 종초홍과 탱고를 추는 장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영화의 백미다. 내 기준으로는 <여인의 향기> 속 알 파치노의 탱고보다, <트루 라이즈>의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제이미 리 커티스의 탱고보다 더 멋졌다. 멋진 탱고가 등장하는 영화를 논할 때마다 왜 <종횡사해>는 거론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1 인이다.


하지만 팬으로서 아쉬운 점은 장국영에게 이런 가벼운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점이다. 홍콩 배우답게 새해에 개봉하는 賀歲片(중국 음력설에 맞춰 개봉하는 코미디 영화)에도 여럿, 장국영 정도의 이른바 ‘급이 있는’ 배우가 굳이 저런 영화에 선택했어야 했을까 싶은 황당한 작품에도 몇 편쯤은 출연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극 중에서 정말로 편안해 보이는 장국영은 몇 되지 않는다. <금지옥엽>이나 <연전충승> 정도이려나.


이 영화가 개봉된 후, 홍콩에서는 '장국영 스타일' 턱시도가 동이 났다고 한다 (어머 손님, 저건 장국영이에요!)


나에게는 <종횡사해>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 홍보마케팅의 일환으로 당시 유행했던 전화사서함을 운영했었다. 당시의 나는 불과 몇 년 전인 ‘국민학생’ 시절에 바비 인형의 전화사서함에 맹렬하게 전화를 했지만 밤이나 낮이나 늘 통화 중이어서 끝내는 포기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장국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서함 앞에 자못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도 실패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밤이나 낮이나 무선전화기를 끼고 사서함에 전화를 돌리고 또 돌렸다. 어차피 실제 전화통화가 아니었고 녹음된 음성을 들려줄 뿐인데 왜 그 시절 전화사서함은 여러 명과 한꺼번에 연결할 수 없었는지.

그렇게 몇 날 며칠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어느 새벽 ‘이번이 마지막이다’하는 순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통화 연결음이 잠시 울리다 이내 <風繼續吹(풍계속취)>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어눌한 목소리로 “안뇽하쎄요. 쟝쿠굥임미다”라고 말하는 장국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의 전율이란.


주윤발의 목소리도 종초홍의 목소리도 함께 들었던 것 같지만 둘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쟝쿠굥임미다”라는 허스키한 목소리만 귓가에 무한 반복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제의 전화사서함에 연결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녹음을 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스피커폰과 녹음기를 동원했지만, 그 새벽의 행운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은 채로 전화사서함 운영기간은 매정하게 종료되어 버렸다.



시간이 흘러 홍콩배우 여명이 우리나라 드라마의 주제곡을 불러 전 국민이 노래방에서 여명의 성대모사를 하던 시절, 나는 종종 <종횡사해>의 전화사서함을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을 ‘쟝쿠굥’으로 어눌하게 발음하던 그가 한국어 노래를 불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곽부성도 알란 탐도 한 번씩 발표했던 한국어 노래를 왜 장국영은 시도조차 않을까 싶었지만, ‘쟝쿠굥’이라는 발음을 떠올리면 그래 차라리 시도를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얼마 전에 케이블TV에서 이 영화를 잠시 봤는데, 이 장면에서 담배에 모자이크 처리가.. (하..;;)


듣기로 장국영이 세상을 떠나던 밤, 주윤발과 종초홍은 부부 동반으로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 장국영의 소식을 듣고 당연히 만우절 거짓말이겠지 하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주윤발은 벽에 머리를 찧으며 괴로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장국영의 장례식에 나란히 함께 모습을 드러낸 주윤발과 종초홍을 보며 나는 <종횡사해>의 아해와 홍두, 그리고 제임스를 떠올렸다.


언젠가 그렇게 다시 뭉쳐 편안하게 웃고 즐기며 연기할 그들을 기대했으나 삼총사의 마지막은 결국 이런 모습이구나 싶어 씁쓸했다.


왠지 그 시절 종료된 전화사서함에서 들려오던 “없는 전화번호입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다시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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