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 덕질의 결정적 순간'을 닫으며
지난 6월의 일이다.
나른한 오후, 휴대폰으로 동료에게 그 날 먹은 밥값을 이체하는데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런데 알림 메시지가 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찰나에 메일 본문의 '부산국제영화제'라는 단어가 시야를 슥 스치고 지나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나에게 메일을 보낼 일이 없으므로, 나는 이 메일이 당연히 영화제 공식 웹사이트에서 온 뉴스레터인 줄 알았다. 그래, 언젠가 회원가입을 해두었던 것 같기도 하네. 그런데 막상 메일함을 열어보니 웬걸, 뉴스레터 대신 엄청난 내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중,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문화축제 플랫폼인 '커뮤니티 비프'에서 온 메일이었다. 관객이 직접 프로그래머가 되어 영화를 상영하는 '리퀘스트 시네마'로의 참여를 제안하는 메일이었다. 영화제 사무국 스탭 중 한 분이 나를 추천해주셨다는 감사한 부연설명과 함께.
갑자기 심장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일을 모두 다 읽기도 전부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구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안에는 한 편의 영화를 신청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으나, 어찌 단 한 편만을 고른단 말인가. 아 어떡해, 너무나도 설레었다.
그 후로 몇 날 며칠 고심한 끝에 나는 결국 3개의 테마를 만들어 이를 연속 상영하는 안을 영화제 측에 제출했다. 너무나 욕심껏 만들어낸 기획이라 사실 받아들여질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더더욱 의외의 답을 받았다. 내 제안이 좋은 기획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리퀘스트 시네마'가 아닌 '리스펙트 시네마'로 옮겨서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오. 마이. 갓.
금요일 저녁의 을지로 입구 사거리 횡단보도를 씩씩하게 걷다가 그 전화를 받은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버렸다.
세상에, 도대체 이것은 꿈인가 생시인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얼떨떨함도 잠시. 곧 담당 프로그래머인 정미 프로그래머님의 진두지휘와 함께 본격적인 준비작업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기획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정리하는 것이었다. 당초 내가 제안했던 연작 상영 외에 2개의 안을 새로 만들었다. 3개 기획의 컨셉은 모두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장국영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3개의 컨셉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획한 것이 선택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장국영의 결정적 순간>이다. 당초 장편영화 3편, 단편영화 1편 총 4편으로 구성된 기획이었다. 참고로 초안 중 장편영화 1편은 여러 문제 때문에 초반에 제외되었다.
사실 여기까지 완료되었을 때 나는 기획전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야무진 착각이었다. 그저 영화를 선정하고, 영화사와 합의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행간에는 많은 업무들이 숨어있었다.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는 <창왕>은 여러 버전의 자막을 검수해서 좀 더 적합한 것을 선택했고, 아쉽게도 상영이 무산된 <연비연멸>은 직접 한 땀 한 땀 자막을 번역했다. 그리고 프로그래머님과 함께 팜플렛과 홈페이지에 들어갈 글을 쓰고, 나중에는 RTHK에 <연비연멸>의 상영을 읍소하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은 영화제 준비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팥빙수를 만드는 일에 비유하자면, 다 만들어진 빙수에 팥과 젤리를 얹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얼음을 얼려서 곱게 갈아내고, 오랜 시간 뭉근히 팥을 쑤어낸 것은 온전히 정미 프로그래머님과 사무국 스태프분들이 해낸 것이다. 저작권자와 상영에 대한 복잡다단한 조건들을 협상하고, 내가 선택한 자막을 확보하여 다시 전문 번역가에게 감수를 의뢰하고, 상영일정을 조율하고, 게스트를 섭외하고, 현장에 대한 준비작업을 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내게 가이드를 내려주고, 그 와중에 기획전을 미루자는 내부 의견을 설득해내는 등... 그분들의 노고는 끝이 없었다.
그래서 모더레이터로 관객과의 토크를 진행하게 되었을 때 무척 어깨가 무거웠다. 그러게 진작 다이어트 좀 해둘걸..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었지만, 잘 해내지 못하면 수많은 분들이 애써 준비한 행사에 누를 끼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행사가 모두 끝난 지금은, 그분들의 기대에 맞게 잘 해낸 것이 맞는지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유리멘탈입니다..)
지난 6월부터, 오늘 10월 24일까지.
'장국영의 결정적 순간'을 위해 달려온 모든 시간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로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즐겁고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꽤 잔인한 시간이었던 2020년의 여름과 가을을 버티게 해 준 것 또한 '장국영의 결정적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연극이 끝난 뒤인 다음 주부터 나의 일상은 과연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