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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Nov 23. 2020

"꺼거, 저는 이렇게 잘 컸답니다."

나의 레슬리 ep46 : 가톨릭대 중문과 교수 오유정 님의 레슬리

늘 하는 생각이지만 장국영의 팬들은 다들 참 잘났다. 하루 이틀 한 생각이 아니라 옛날 옛적 90년대부터 품어온 가설이었다. 나도 그 잘난 사람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들어보자는 수작도, 다 함께 자뻑에 취해보자는 궁리도 아니다. 내 주변의, 혹은 저 멀리 어딘가의 장국영 팬들을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들 어쩜 이렇게 잘나고 멋진 사람들이 많은지. 나는 늘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곤 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한때는 장국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에 대해서 분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오래도록 품어온 가설에 새로운 물증을 제시해주는 팬을 발견했다. 무려 장국영에 대한 '논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분이었다. 게다가 현직 교수님이시라고 했다. 이야, 이제는 장국영이 연구대상이 되어 논문에도 등장하는구나 싶어서 실제로 읽어보기 전부터 감격부터 해버렸다.

레슬리, 여기 잘난 팬 하나 추가요!



<후(後) 장국영 시대 팬덤의 정체성과 사회문화적 함의>.

논문을 구해 명조체로 쓰여진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후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장국영과 그의 팬덤에 대한 연구였다. 논문에는 그보다 한참 어린 후영미들이 왜 그에게 빠져드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석하고 있었다.


그저 체감으로 느끼던 것을 제대로 분석해서 써 내려간 글을 다 읽고 나자, 나는 '이 논문을 쓰신 분을 꼭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주인공은 가톨릭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오유정 교수님.


결국 나는 마치 이 밤이 지나면 띄우지 못할 연애편지를 쓰는 듯한 결연한 마음으로 앉은 자리에서 두서없이 메일을 써내려갔다. 그리고는 퇴고조차 하지 않고 곧장 '보내기' 버튼을 눌러버렸다. 어머나, 그런데 이 분의 이메일 아이디가 참 재미있다. 무려 aigege(愛哥哥 / 꺼거를 사랑해). 찐 팬의 묵직한 향기가 훅 끼쳐왔다.

아, 이 분 레알이구나. 또 한 번 가슴이 뛰었다.

 


그 날 오유정 님께 선물 받은 논문. 감사히 잘 간직하겠습니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11월의 어느 밤, 우리는 샤로수길에 새로 생긴 와인바 '아비정전'에서 만났다.

서로가 찐팬임을 인증하듯 마스크도 벗지 않은 채로 인사만 나누고서 그녀와 나는 마치 10년 지기라도 되는 듯 사이좋게 ‘아비정전’의 공간들을 돌아보며 곳곳에 숨겨진 디테일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었다. 한참 공간에 대한 수다를 떨고 나서야 그녀의 명함을 받아 든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 분, 영어 이름이... 무려... Leslie다.


노래 가사에서 따온 Monica나 Isabel 따위는 가뿐히 뛰어넘는, Leslie라니요.

아니, 이것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오즉여 여즉오(吾則汝 汝則吾 / 나는 너, 너는 나)의 경지인 것인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본인과 같은 '老榮迷(후영미의 반대말 / 장국영의 오랜 팬)'는 오랜만에 만난다며 반가워하는 그녀. 나에게 인쇄된 논문을 선물하고는 본인도 오랜만에 읽어보았다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교수님이라는 직함 때문인지 상당히 중후한 분이 나오실 것이라 상상하고 긴장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중후는 오롯이 나의 몫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발랄한 소녀 같은 느낌이랄까.


"저도 20년 넘는 팬이에요"하고 말하는 그녀는 홍콩영화 광풍도 <총애 장국영>의 유행도 지나가버린 뒤 <천녀유혼>의 백면서생 영채신을 보고서 팬이 되었다. 비록 시작 시점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는 추억 속의 라디오 프로그램 "PBC 영화음악"이나, KMTV의 중국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동방특급"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비슷한 시기를 그의 팬으로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내한 당시에 공항과 사인회에 모두 갔었다는 것. 물론 이조차도 서로 시기는 달랐지만, 언젠가 한두 번쯤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내한 썰을 아니 들어볼 수 없다. 오유정 님은 <Printemps>와 <성월동화> 두 번의 내한을 경험했다. <Printemps> 내한에는 타워레코드의 사인회에 가서 미술시간에 직접 만든 '패왕별희' 인형을 레슬리에게 안겨주고, <성월동화> 당시에는 공항에 가서 그에게 직접 사랑고백(!)까지 했다고.


사랑 고백의 전모는 이렇다. 김포공항에서 출국하는 그를 보려고 기다리던 중, 남들은 모두 다른 쪽 출구에서 기다리는데 웬지 이상한 예감에 끌려 반대 방향의 출구로 가봤더니 그가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던 중이었단다. 그래서 바삐 그에게 달려가 손수 고이 접은 백합꽃을 그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며(혹은 바치며) "꺼거, 워 아이 니"하고 고백을 했다.


여기까지 듣자 나는 당연히 대흥분. "꺄악! 그래서 레슬리가 뭐랬는데요? 뭐라고 했어요?"라며 그 다음 이야기를 보채는 나를 보며 그녀는 맥없이 웃었다.

"별 말 없이 그냥 가던데요."

아니, 사춘기 소녀가 밤잠 설쳐가며 한 땀 한 땀 손으로 접어낸 꽃을 그렇게 덤덤히 받을 일인가 싶어 내가 다 야속한 마음이 든다. 사람 많고 붐비는 공항이었으니 수줍게 건넨 작은 목소리가 미처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아쉬움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건넨 꽃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이곤 뚜벅뚜벅 멀어져 갔다던 꺼거. 그는 알고 있었을까, "꺼거, 워 아이니" 그 한 마디를 위해 그녀가 무려 원어민에게 특훈까지 받았다는 것을.




오유정 님이 선물한 종이 백합꽃을 들고 있는 1999년 7월 22일의 레슬리 (사진제공 : 오유정 님)




"꺼거와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통역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통역을 하려면 통역대학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만 생각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덕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녀의 현재는 모두 레슬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린 시절 장국영을 실제로 만나려면 통역가가 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다시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물론 방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슬리를 인생의 이정표 삼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던 그녀는, 그야말로 정체성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그를 통역사로서 만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십수 년간 공부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 방황 끝에 공부를 그만두고 몇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도 오유정 님의 일상에는 장국영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중국어 수업도 맡고 있는데, 예문에 종종 장국영을 등장시킨다고 한다. "장국영이 상해에 갔다", "나는 장국영을 두 번 봤다" 같은 문장이 종종 등장하기에 학생들도 교수님이 장국영의 팬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게다가 장국영으로 논문까지 쓰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를 찾아내게 된 계기인 논문은, 의외로 전공 논문으로 머리를 싸매던 도중 리프레시 삼아 시작한 것이었단다. 논문을 리프레시 삼아 쓴다고? 공부와는 그다지 친하게 지낸 기억이 없는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려는데, 그녀가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시작은 리프레시였으나, 결과론적으로는 전공논문보다 훨씬 더 공들여서 쓰게 되었다고. 15주기에 맞춰서 발표하고 싶었지만 수정을 반복하다 보니 4월 1일을 훌쩍 넘겼지만 그래도 다행히 해를 넘기지는 않았다며 웃는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 4월 1일, 이라는 단어에 다시 심장이 잠시 잠깐 걸음을 멈춘다. 그녀에게 2003년의 그 날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다.

그녀의 2003년 만우절은 대학시절 북경에서 어학연수를 받을 때였다고 한다. 당시에 기숙사에는 TV도 없고 인터넷도 흔치 않았을 시절이라 그 다음 날에야 알게 되었다. 이튿날 평소처럼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친구가 대뜸 장국영이 죽었다고 해서 진심으로 화를 냈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학교 내 신문가판대에 대문짝만 하게 걸린 헤드라인 기사를 보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며칠 만에 3kg이 훌쩍 빠져버렸다.


이 이야기를 하며 서로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는데,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번역했던 글 "만약 장국영이 살아있다면"의 내용을 이야기해주었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글이라며.


如果 张国荣还在,他应该也有了自己的facebook或者微博, 他会不会也是一个微博控?
每天告诉大家他的最新动态,喜怒哀乐,让我们知道他在做什么?
他会不会在今年的愚人节发出一条微博,恶搞一下,成为我们大笑之后的谈资

만약 장국영이 살아있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facebook이나 weibo를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그도 sns의 광팬이 되었을까요?
매일 자신의 최신 동향과 희로애락과 같은 기분을 전하고, 우리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렸겠지요? 어쩌면 올해 만우절에도 weibo에 장난 섞인 글로 우리에게 큰 웃음을 전했을지도 모르지요


如果 张国荣还在,
愚人节就真的只会是一个纯粹愚人节,就不会像现在这样每一年的4月1日,一边是一个充满恶搞气息的杜撰的愚人节,一边是永远让人伤痛的张国荣忌日

만약 장국영이 살아있다면,
만우절은 그저 단순한 만우절이었을 거예요.
지금처럼 매년 4월 1일이 각종 거짓 소식이 난무하는 만우절이자, 영원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장국영의 기일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 그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시절에 함께 활동했던 사대천왕들이 팬들과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데 그녀 또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당신들이라도 행복하게 잘 살아달라 하는 마음이 든다며.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만약 누군가가 레슬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 준다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으냐고. 나의 엉뚱한 질문에 그녀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행복하냐고 묻고 싶어요. 지금 잘 지내고 있느냐고.

스타가 아니어도,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 행복했으면 좋겠다고요.

꺼거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본인만 행복하면 되고, 세상과 타협해도 되는데 너무나 완벽주의자였지요.

자기한테 너무 엄격한 사람인 것 같아요.

흠이 있어도 괜찮고 실수해도 괜찮은데 말이에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 살았더라도 좋지 않았을까요."



보고 싶다는 말보다 훨씬 더 그리움이 담긴 행복하냐는 질문이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비범하게 살아서 더 슬펐던 사람이기에 차라리 좀 더 평범했어도 좋았을 것이라 말하는 마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내 마음 또한 그렇기에 더 여운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레슬리는 삶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인생의 우상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모든 일에 임할 때에 '꺼거라면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나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면서. 그래서 꺼거의 팬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울 때가 있노라고.

그래서 레슬리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면 잘 지냈느냐, 물은 다음에는 "꺼거, 저 이렇게 잘 컸어요", 하고 그에게 알리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장국영의 팬으로서 얼마나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 <아무튼 장국영>을 쓰고 있다. 논문도 썼고, 중국에서 쓴 학위논문 후기에 장국영에 대한 감사인사도 남겼지만 오랜 팬의 멋진 성장기의 정점이자 방점은 아마도 <아무튼 장국영>이 되지 않을까 싶다.

15주기에 맞춰서 논문을 냈던 것처럼, 20주기에 맞춰서 책을 내고 싶었지만 그보다 빠른 내년 4월 1일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의 모든 첫 시작은 꺼거였어요.

이만하면 나 좀 잘하지 않았어요? 이 정도면 팬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어요?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담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그래, 그녀는 참 잘 컸다. 그리고 장국영의 팬 답게, 참 멋지고 잘났다.


내년 4월에 만나게 될 그녀의 레슬리가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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