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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희 Oct 14. 2021

스크린에서 그녀, 매염방을 만나다.

영화 <매염방>을 보고

매염방. 나는 그녀를 1990년,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했던 장국영 주연의 영화 <우연>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머지않아 <연분>이라는 또 다른 장국영의 영화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고, 그다음에는 불법으로 복제한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가수로서의 그녀와 만났다. 장국영의 국내 미발표 앨범을 판매한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동대문운동장 근처의 '빽판 구루마'를 찾아간 길이었다. 하굣길이면 판이 벌어지곤 했던 카세트테이프 좌판들이 물건을 떼 오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애타게 찾던 장국영은 없고 매염방의 앨범만 있었다. 벼르고 별러서 간 길이라 빈 손으로 돌아올 수는 없어서, 결국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테이프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이 동대문운동장 근처의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DDP 근처에 갈 때면 그날의 우중충한 좌판들과 그 사이를 누비던 어리바리했던 내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비장하게 사 온 것이 무색하게 그 앨범은 몇 번 듣지 않았는데도 테이프가 처절하게 늘어져버렸다. 덕분에 내 방에서 곧장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매염방이 한쪽 머리를 쓸어 올리던 커버 사진, 그리고 "예리야(耶利亞)"와 "커버 걸(封面女郞)"이라는 곡이 수록된 앨범이었던 것만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고 보니 1990년에서 1991년으로 넘어가던 무렵에 샀던 그 카세트테이프는 1990년 3월에 홍콩에서 발표되었던 <封面女郞(커버 걸)>이었다. 어쨌든 매염방은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앨범을 구입한 첫 번째 여자 가수였다.



내가 구루마에서 샀던 앨범 <封面女郞 (커버 걸)>



그리고 그녀는 나의 기나긴 장국영 덕질의 길에서 늘 마주치게 되는 사람이었다. 한때 장국영과 한 음반사에 몸담았던 적이 있었고, 함께 출연하고 부른 영화와 노래도 여럿이었으며, 결정적으로 그의 절친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매염방, 그리고 아니타라는 그녀의 존재와 이름은 장국영만큼이나 늘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당시에는 한 번도 내가 그녀의 팬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사실 나는 내내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이 영화가 상영된다고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무조건 봐야 한다"였다. 하지만 일주일 사이 두 번이나 서울과 부산을 왕복한다는 계획이란, 한참 전부터 일정을 이리저리 조정을 했어도 결코 이루기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결국 이 영화의 관람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다행히도 연이 닿아 <그대와 야반가성>의 진행자이자 구성작가로서 기자시사에 다녀올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일어난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도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 물론 그로 인해 또다시 일정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매염방을 만날 수 있다는데 말이다.




화성 음반사 소효량 사장은 첫 녹음을 앞둔 매염방에게 "슬픈 곡은 슬픈 척이 아니라 정말 슬퍼야 하고, 신나는 곡은 네가 흥분하지 말고 관객을 흥분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 스포일링을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얻게 되는 것이 불편하시다면 여기서부터는 읽지 않으시는 것을 권합니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트레일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본 상태였다. 그래서 대충 첫 장면은 이러할 것이다, 라는 나름의 예상이 있었다. 그녀가 출연했던 1985년의 영화 <우연>의 시작처럼, 홍함의 야경에서 콘서트장인 홍함 체육관 내부로 카메라가 빠져들듯이 이동하리라 짐작했다. 가장 마지막에 공개된 트레일러의 시작이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생애 마지막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앞둔 매염방이 의상 디자이너인 유배기에게 "무대가 그리울 거예요"라고 말한 후, 카메라는 내 예상과는 거꾸로 콘서트장 안에서 밖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멀어진 카메라는 관객을 까마득히 먼 과거인 1969년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 이후부터 매염방의 일대기를 차근차근 따라간다. 꼬마 시절부터 서야 했던 무대, 고작 19살의 나이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취객으로 가득 찬 나이트클럽 공연.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온 가수로서의 데뷔 기회.

마침내 가수가 된 그녀의 삶을 따라가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그녀의 인생을 스쳐간다. 가장 뜨겁게 사랑했으나 결국은 맺어지지 못한 일본 가수( 배역은 실제 인물이 아닌 '구도 유키'라는 가상의 인물과 스토리로 각색되어 등장한다)도 결국 그녀와의 사랑 대신에 자신의 커리어를 택하고, 삼합회에게 쫓기는 내내 그녀의 곁을 지켰던 연인과도 이별한다. 또 시간이 흘러 데뷔부터 그녀를 지켜봐 왔던 화성 음반사의 총책임자 소 선생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4살 때부터 무대에 함께 섰던 언니 역시 병마로 인해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무명의 시절에 만나 각자 콘서트를 열게 되면 서로 게스트가 되어주자고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지키며 오래도록 우정을 쌓아왔던 장국영 조차도 결국에는 그녀의 곁을 떠난다. 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싶어 했던 매염방이었지만, 그녀의 애정은 늘 쓸쓸하게 끝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협’으로서의 큰 그림자에 가려진 사랑받지 못한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 숱한 이별의 와중에도 그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가수 인생에 큰 동반자였던, 패션 디자이너 유배기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매염방과 유배기의 오랜 우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매염방의 인생경로를 다루는 와중에 늘 그녀의 곁에 있었던 유배기가 자연스럽게 앵글에 함께 잡힌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유배기를 연기한 고천락은 알고 보니 특별출연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매염방의 또 다른 친구인 장국영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사실 나는 그동안 장국영 입장에서 바라본 매염방만을 알아왔기에, 매염방 입장에서 바라본 장국영은 내가 알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특히나 극 후반 그와의 이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장국영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마도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그와 이별을 해야 했을 것이다. 나 또한 내가 품은 이별의 슬픔이 너무 컸기에, 다른 사람 입장에서의 상실은 제대로 상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매염방이 장국영에게 던지는 마지막 원망의 말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의외였고 슬펐던 장면이었다.

또한 18년간 단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장면들을 도망가지도 못할 극장의 좌석에 앉아 큰 스크린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 또한 무척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이었다. 덕분에 제대로 울지 못했던 과거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나는 쉴 새 없이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결국 마스크 속이 눈물로 온통 축축하게 젖어버렸을 만큼.



극 중의, 그리고 실제 매염방과 장국영. 영화 <연지구> 촬영 당시의 모습.



사실 누군가의 전기는 영화로 만들기에 가장 어려운 장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사자의 실제 삶이 곧 스포일러나 마찬가지라서 관객은 이미 모두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뿐인가, 함부로 내용을 바꿀 수조차 없다. 또 전기가 만들어질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므로 설정 하나, 장면 하나에도 토를 달고 늘어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존했거나 실존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 인물과 상황, 사건과 계속해서 비교당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니 말이다. 극을 쓰고, 촬영하고, 연기하는 모두가 그 점 때문에 괴로울 터.


이 영화에도 수많은 실존인물들이 등장한다. 당사자인 매염방을 비롯해 언니인 매애방, 작곡가 여소전, 매니저 진숙분, 음반사 대표 소효량, 디자이너 유배기, 그리고 장국영. 거기에 매염방이 키운 후배인 초맹까지, 실로 수많은 실존인물들이 등장한다. 신기한 것은 영화의 초반부에는 그 누구도 실제와 비슷하다고 여겨지지 않아서 영 어색했는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영화 속의 배우들이 실제 그 인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외모면에서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장국영의 역할 조차도.


그리고 그렇게 배우들이 마치 실제 그 인물인양 느껴지게 하는 데는 음악과 자료화면의 공이 컸다고 생각한다.

극 중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모두 배우의 목소리와, 실제 매염방이 불렀던 노래가 번갈아 흐른다. 덕분에 배우는 실제로 노래를 하기도 하고 립싱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그 당시의 매염방의 실제 모습이 마치 기록영화처럼 화면에 등장한다.

그래서 음악과 화면 모두 극과 실제를 마구 오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영화에 흠뻑 빠져버리게 된다.


게다가 주연을 맡은 왕단니는 매염방과 무척 닮았다.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무척 멋진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매염방이 마르고 키도 작아서 작은 체구였음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했던데 비해, 모델 출신의 왕단니는 말랐으되 키가 꽤 크다. 그래서 매염방에 비해 훨씬 훤칠한 느낌이고(사실  점은 등장인물 대부분 그렇다. 아무래도 배우들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평균 신장이   모양이다), 얼굴의 선도 목소리도 원래의 그녀보다 훨씬 더 곱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고 나면 왕단니의 얼굴에서 정말로 매염방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분장팀은 물론이고 배우 스스로도 많은 노력을 한 결과일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나서 입술에 힘을 준다거나 하는 매염방 특유의 버릇을 재현해내려고 애쓰는 배우의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드는 아쉬움은, 아무래도 이 작품이 국내에 수입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매염방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아무래도 홍콩 현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므로.

그리고 강직한 성격을 지닌 그녀를 너무 아름답게만 그렸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너무 위인전 같은 느낌이기도 해서 그녀를 좀 더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렸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게다가 그녀의 삶과 커리어에 대한 이해도를 가지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았을 때의 간극 또한 꽤 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극 중에 새로운 인물이나 상황이 등장했을 때 그 의미를 대체로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보니 나로서는 영화 전반이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고, 덕분에 영화가 의도한 대부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보는 이 영화가 어떤 모습일지는, 나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매염방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갈지 무척 궁금하다.


또한 이 작품은 매염방을 떠나서, 홍콩이나 홍콩 연예계에 대한 이해도가 있다면 더욱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홍콩에서 갓 데뷔한 신인가수들에게 홍함 체육관이 어떤 의미를 가진 무대인지, 그리고 마침내 그 무대에 서게 되었을 때 듣게 되는 “너를 증명해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당시의 (심지어 나이트클럽에서 인기가수가 콘서트를 하는 경우도 잦았다) 상황이나, 건달들이 좌지우지했던 그 당시의 연예계. 그리고 서로 완전히 상반된 삶을 살아왔던 장국영과 매염방이 긴 세월 진정한 우정을 쌓았던 것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사족이지만 어린 나이부터 무대에서 노래를 했던 매염방과 달리, 장국영은 10 초반에 영국 유학을 경험한 도련님이었다.  둘이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왔는지는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함축적으로 설명되긴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Eddie 유배기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매염방



영화는 매염방이 마지막이 될 무대를 코 앞에 둔 상황에서 과거로 회귀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무대 위로 오르는 구성이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그린 <보헤미안 랩소디>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헤미안 랩소디>와 달리, 예의 그 우렁찬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실제 매염방의 모습으로 끝맺음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엔딩 스크롤이 흐르며 매염방의 생전 모습과 함께 그녀의 노래 한 곡이 조용히 흐른다. 나는 영화가 끝나면서 아 이제 그만 울게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애정 하는 곡이기도 했고, 그래서 매염방의 노래를 선보였던 <그대와 야반가성>에서도 틀었던 곡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를 대표하는 히트곡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엔딩 스크롤에 그 노래를 선곡했던 감독의 마음이, <그대와 야반가성>에서 그 곡을 골랐던 나의 마음과 같은 것 같아서 괜히 왈칵 더 눈물이 났다. 영화의 방점을 찍는 것 같았던 자전적인 가사의 해석을 읽으며 또 한 번 울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 없었고.



사실 이 작품은 너무나도 주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래서 글을 쓰는 내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보다는 지엽적이고도 개인적인 감상이 더 앞서게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 작품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보다 많은 한국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언젠가 장국영의 생을 그린 영화도 만날 수 있기를, 그래서 내가 익히 알아왔던 장국영의 시각으로 바라본 매염방도 스크린에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dZiJrX5zt3s&t=2s

듣고 가시면 영화를 보시는데 도움이 될 거라 믿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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