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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의 성장일기 Oct 04. 2023

남편과의 대화; 별로인 상황이라는 걸 인정하기

남편이 한 말이라 더 신경 쓰이는 걸까 

이번의 연휴는 참 길었다. 저번주 화요일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경주여행을 갔다가 토요일에 돌아와서, 그 후로 1박을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도 이틀을 더 집에서 아이들과 복닥복닥 보냈었으니, 왠지 일주일째인 지금이 - 10월 3일 - 길게 느껴진다. 이번 연휴에는 경주라는 도시를 많이 걸었고, 570쪽짜리 Steve Jobs 전기를 원서로 읽었고 (확실히 하루에 3시간 책 읽기를 20일 하고 나니 책 읽는 속도와 집중력이 매우 빨라졌다), '오펜하이머' 영화를 드디어 보았고, 그리고 정말로 오랜만에 남편이랑 이야기를 했다. 


나의 경우 남편이랑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기회가 많이 없다. 집에 둘만 있는 경우도 거의 없고, 따로 둘만을 위해서 시간을 열심히 내는 편도 아니다.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이지만 알콩달콩 이런 분위기는 거의 없고, 사무적인 혹은 현실적인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라 - 예를 들어서 오늘은 누가 저녁약속이 있고, 아이들은 언제 끝나고 등등 - 서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부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남편과 진지한 이야기를 오랜만에 하게 되면, 하도 중간에 대화가 없다가 얘기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서로 혹은 어떤 상대방이 놀라게 되는 경우도 많다. 황당해서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뭐 엄청나게 좋은 부부관계는 아닌 거 같기도 한데, 그래도 옛날보다는 서로 많이 부드러워(??) 진 것 같기는 하다.  


커리어를 기업금융부서에서 시작한 남편은 매우 직설적이고,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보통은 굽히지 않는다. 회사에서 보통은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성격의 남자분들만 보던 나는 - 내가 본 리서치 사람들의 성격이 대부분 그렇다 - 집에서는 같이 사는 남자가 너무 다름에 대해서 자주 당황해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첨언을 하자면 보통 본인의 부서가 회사에 돈을 직접 벌어준다고 생각하는 기업금융부서의 사람들은, 직접적인 매출의 압박이 없는 리서치 사람들보다 캐릭터들이 센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랬는데, 그 사람들 중에 하나가 내 남편이었다.   


결론적으로 남편이랑 대화를 하고 나서 솔직히 기분이 계속 가라앉아 있다. 남편은 내가 다니던 회사가 파산한 이후에 별 말이 없었다. 딱히 위로도 없었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냥 본인의 인수 합병 경험상 한국의 경우는 좀 오래 걸릴 것이다 -라고 했다. 본인의 일이 바쁘면 주변 상황을 세심하게 보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입에 발린 따뜻한 말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나도 딱히 남편의 케어를 갈구하지도 않았다. 그냥 상황을 업데이트를 했고,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맞다, 사무적인 대화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오랜만에 둘이서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남편은 정말 내 상황이 괜찮지 않다고 했다. 리서치라는 부서는 - 특히 외국계에서 리서치라는 부서는 - 돈을 벌어오는 부서가 아니라, 돈을 벌어오는 기업금융부서를 서포트하는 역할이 더 커졌고 - 솔직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 그렇기에 정말 너무 못하지 않는 한 직업의 안정성이 있었으며, 또한 애널리스트는 라이센스가 없지만 플랫폼 파워로 인해서 라이센스가 있는 것같이 대접받는 나름 괜찮은 직업이었으며, 원래 40대 중반까지 열심히 커리어를 쌓아놓은 후에 그걸 기반으로 계속 올라가야 하는데, 지금 40이 되려고 하는 너의 경우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정말 괜찮지 않다고 했다. 물론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퇴직금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걸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커리어에 중요한 나이일 때 지금 이런 일이 생긴 건 별로라고 했다. 직업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반문하고 싶었지만 - 아니 내가 다니던 회사는 파산했지 않은 가 - 사실 정말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지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가라앉아 있다. 모두들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정말 나는 괜찮은 걸까. 나 스스로도 괜찮다고 그냥 속이면서 있었던 거 아닐까. 치열하게 일해야 하는 나이에 지금 몇 개월째 이렇게 있는 게 괜찮은 걸까.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는 회사를 다닌다고는 하지만, 지금 회사가 이렇게 된걸 자세하게 말하지 못하는 찌질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회사라는 것, 그리고 내 직업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했는데. 집에 매일 오는 이모님에게 아직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느라 회사에 가지 않을 때는 오전에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오는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도 나는 캐피탈 마켓에 아직 있고 싶은데, 정말 자리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산업의 구조조정이 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업황이 너무 좋지 않은데 과거의 분들처럼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작년만 해도 정말 회사를 나가고 싶었는데, 그때 더 열심히 구인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해야 하는 걸까. 15년 넘게 애널리스트만 해서, 여기에 너무 적응이 되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솔직히 괜찮지는 않다. 그냥 괜찮은 척했던 거다. 


지금이 내 마음의 바닥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이 든다. 정말 오랜만에 말을 한 남편이랑 한 대화에서, 넌 지금 괜찮지 않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만큼 내가 마음이 약해져 있다는 뜻도 될 거다. 이 상황을 잘 넘기고 나면 나는 더 단단해져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여야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냥 지금 괜찮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솔직히 별로인 일이 일어나기는 했어. 그렇다고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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