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를 다닌다는 사실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이 정말 좋았다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월급이 들어와서 남의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는 게 좋았고, 워킹맘으로서 집에서는 부족하다는 눈치를 받아도, 일은 하는 만큼은 인정을 해주는 것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그와 관련해서, 나라는 존재를 명확하게 나타내주는 명함도 좋았다. 또한 나의 직업이 혼자 일을 하다 보니 비교적 시간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 점이 좋았다. 물론 잠시 아이 병원을 다녀오느라 낮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쓰면 자발적으로 내가 한 시간 정도 더 일을 했고, 내가 조사하는 산업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이 정말 많았던 2021년에는 밤까지 컨퍼런스 콜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지만, 투자자들과 그리고 동료들과 대화를 하면서 성장하는 부분들이 좋았다.
물론,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많았으며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을 때는 힘들기도 했다. 이제는 예전만큼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지만, 내가 추정한 실적이 실제가 많이 다르다던가, 내가 예상한 주가가 실제흐름과 다르면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나의 이름으로 발행된 나의 리포트와,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와 나의 직업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너무 힘든 사수 - 집에 안 가는 사수여서 책상 밑에서 이불 깔고 자기도 했었다 - 를 만났었을 때도, 애를 둘을 낳는 과정에서 육아휴직 없이 출신휴가만 쓰면서 - 그 과정에서 둘째를 낳고 이모님을 7번을 바꾸었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 도 그만두겠다는 부분은 나에게 옵션이 전혀 아니었다. 회사는 언제나 있었고, 집에서 지지고 볶고, 부족한 엄마라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회사에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일 그리고 나만의 명함이 있으면 그 부분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작년쯤인가 경쟁사에서 결혼하신 여자분이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분이 해고계약서에 싸인을 안 하고 버티고 있다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남편도 잘 버는데 그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다며, 특이하다고 동료분이 말씀해 주셨다.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으면 관련한 가사들이 많았을 것이고, 워킹맘이면 그런 가사들을 완벽하게 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에 주변 어른들이나, 엄마가 가사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보았던 남편에게는 한없이 부족하게 보였을 것이다. 집에서의 자존감은 많이 떨어졌을 것이고, 그나마 회사에서 자존감을 보전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색깔의 가족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남편분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 여자분이 해고통보를 받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회사에 나와서 남들이 말 한마디도 안 걸어주는데 버티고 있다고 하면, 나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런 상황이 되었다. 합병법인에 들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정말 옵션이 아니었고, 당연히 장기적으로 다시 직업을 구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다잡아 보아도, 막상 앞으로 몇 개월 이후에 내가 출근할 곳과 나의 직함과 나의 월급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정말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업계 사람들은 이런 일은 금융업에서 빈번하다며, 2008년에 있었던 노무라의 리만 인수 때 나가게 된 인력이 직업을 다시 다 구했다고,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지만, 또다시 한번 현실적으로 보자면, 대한민국은 그 당시처럼 성장하고 있지 않으며, 외국계 금융회사들의 한국 주식시장에 대한 관심도는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3월 말에 느꼈서 써 놓았던 막막함은 4개월이 지나는 이 상황까지도 아직 변함없이 막막하게 여겨진다. 6월에 합병법인이 출범하고 해고 통지가 7월 말부터 다른 지역에서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아직 답이 없음에 조금은 무력하게 느껴진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나의 증권에서의 15년 경력이 다른 방향으로 틀기에 애매한 경력과 애매한 나이라는 피드백이 많았다. 그렇다고 업계에 계신 다른 분들처럼 투자를 잘해서 엄청난 돈을 모아 두지도 않았다. 돈은 계속 벌어야 하는데, 회사에서의 명함과 거기에서 나오는 월급은 나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한 가지 일만 계속했더니 다른 걸 뭘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고 갑자기 현금이 들어오던 게 안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너무 막막할 뿐이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 내가 나 스스로 주도권을 잡고 내 인생을 바라보지 않았던 건가. 내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어서 회사가 없어진다고 하니 이렇게 막막한 것인가. 나는 증권업계에 있으면서 투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건가. 3월 말의 합병 발표 이후에 스스로가 부끄럽고 작아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면접들을 몇 번 보게 되었고, 그 결과들은 생각보다 참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