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리포트를 발간하며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 3월 말부터 있었던 일을 시간순서대로 쓰려고 했다. 한 달, 두 달, 세 달 벌써 다섯 달째 접어드는 상황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시간 순서대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자꾸 바뀌고, 그만큼 나의 생각도 바뀌고, 내가 써 놓은 상황들 자체도 바뀌고 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그냥 있는 상황들을 쓰면서, 과거에 내가 써 놓았던 글은 짬짬이 올리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8월 중순이고, 3월 말의 발표 이후로 4개월 반 정도가 지나갔다. 회사를 다닐 때는 3개월만 나에게 시간이 주어지면 자격증도 따고, 책도 많이 읽고, ESG도 공부하고, 운동도 하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라는 사람이 바뀌지 않은 이상 그 생각들은 거의 '망상'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7월에 가족들이랑 3주 정도 여행을 다녀오고, 운전실력이 '드디어' 늘었으며, 운동을 해서 배가 조금이나마 들어갔으며, 책들을 더 많이 읽게 되었다는 것에 위로를 삼아보고 있다.
어쨌든, 6월에 합병 발표가 되고 나서 7월부터 감원을 할 예정이라고 뉴스기사가 뜨기 시작하더니, 저번주부터 다른 지역 혹은 다른 부서에서 해고 통보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워낙 큰 회사이다 보니 순차적으로 지역별로, 부서별로 나누어서 하는 것 같다. 해고 통보 이기도 하고, 합병 법인의 다른 부서로 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다른 부서인 만큼 연봉이 보전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후자가 아닌 것이 확실해서, 통보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언제일까 언제일까 생각만 했는데, 정말로 이제는 눈앞에서 감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실 감원 자체는 몇 번이고 겪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해고 통보, 회사라는 곳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있는 통보는 처음이다. 근간 자체가 없어지는 일을 겪고 있으니, 뭔가 이제까지 일을 열심히 했다는 뿌듯함 보다는, 나는 왜 그렇게 인터넷 섹터가 날아가던 2021년에 '악착같이' 일을 했던 걸까 라는 자괴감이 제일 크다 (회사가 날아가는 상황에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일 자체를 열심히 한 건 후회가 없다. 하지만 '나의' 섹터,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나의' 지도를 크게 그리는 것에만 집착하여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던 상황들이 너무나도 후회스럽다. 솔직히 당시 시장이 좋았던 것이고, 코로나로 인해서 인터넷 섹터가 좋았던 것이지, 내가 잘난 게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내가 뭐 그리 특출 나게 잘났나 싶다. 물론 열심히 주어진 일을 했고, 버텼고, 나의 건강보다 일을 우선시했다. 나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해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그냥 회사에서 하라고 한 일을 열심히 했고, 그 과정에서 '나의' 것을 열심히 하는데만 너무 치중해서 장기적인 그림을 못 본 것 같다. 섹터가 올라갔으면 내려가는 건데, re-rating을 했으면 de-rating도 하는 건데, 리포트에 이름이 들어가고 아니고 가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었나 싶다. 내가 읽는 블로그 중에 '메르의 블로그'에서 메르 님이 회사생활에 대해서 굳이 관계를 나쁘게 만들 필요 없다고 쓰신 대목이 있었는데, 나는 정말 그 대목에 너무나도 동의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해고 통보가 되고 있는 이 시점은 분기 실적 시즌이다. 아직 커버리지는 있고, 내가 애정을 가지고 커버했던 회사들이고, 그래서 주요 회사들의 분기 실적 노트는 쓰고 있다. 그리고 정말 이 회사의 로고로, 이 시스템으로 쓰는 마지막 리포트들이 될 것 같다. 마지막이라고 아주 솔직하게 쓰고 있는데, 모델 업데이트도 빠르고 글도 잘 써진다. 매번 남들이 내 리포트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부분 때문에 고민만 하다가 애매모호한 글이 나온 적도 많았는데, 솔직하게 그냥 안 좋은 건 안 좋다, 좋은 건 나는 좋은 것 같다 이렇게 쓰니, 글이 참 잘 써진다. 너무 아이러니하다.
다른 지역에서 이미 해고 통보를 받은 동료는, 본인은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놀랐다고 했다. 다른 동료는 기존 회사에서 아무런 가이던스가 없이 마음은 표류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해고 통보의 싸인을 이야기하는 상황이 너무나 'scary' 하고 황당하다고 했다. 황당한 건 맞다. 해고 통보가 이루어지기 전날에 부서의 글로벌 헤드가 컨퍼런스 콜을 했는데 -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 거창하게 모든 구성원에게 참여하라고 하더니 달랑 5분 동안 미안하다, 하지만 자랑스럽다, 얘기하고 끝냈다고 들었다. 그날 그 헤드와 오피스에서 마주친 직원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물으니 나는 합병회사로 가지만 너네들은 해고될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이런 게 각자도생 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들을 생각만 하고, 듣기만 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렇게 글로 쓰고 보니 나도 가슴이 답답하다.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가면 내가 더 단단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아니 그렇게 믿으려고 아주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몇 개월을 (한 달 일지도 모르지만 의무 휴식 기간을 포함해서 몇 개월이라고 믿고 싶다, 아 나는 이미 현실 도피를 하고 있나 보다), 끊임없이 생각만 하고 걱정만 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나의 건강과 아이들 그리고 공부하는데 쏟고 싶다. 그냥 혼자가 괴로워서 누구라도 붙들고 얘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럴 경우 역효과만 있는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여러 번 글을 써서 올리려고 시도했는데, 잘 안 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에게 솔직하지 않아서 글을 잘 안 써진 것 같다. 그래, 솔직하게 하나도 괜찮지 않다. 지금도 심호흡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척했던 것 같다. 이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회사가 잘못해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라고 얘기도 들었지만, 하나도 안 괜찮다. 그 회사가 잘못해서 어쨌든 나의 직업은 없어지고, 다시 이 업계에서 직업을 구하려고 했는데 보니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냥 괜찮지 않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보내야겠다.
그나마 오늘은 해고통보를 받는 날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