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알 수 없는 나른함에 비몽사몽 한 채로 살았다. 감기 몸살 기운 때문인지, 계절이 바뀌는 탓인지, 아니면 마음의 방향이 어긋난 탓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은 그저 봇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회사에 필요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까지는 즉각적으로 처리했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공중에 매달린 듯 허공을 떠돌 뿐이었다.
해야 할 일은 수없이 머릿속에 떠다니는데 정작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마치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아직 교실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처럼 허둥대기만 했다. '이 나이에 무슨 새 학기 증후군 인가?‘ 싶다가도, 곧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늘 새로운 적응의 시간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생의 각 계절은 언제나 새 학기처럼 낯설고, 그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초보자가 된다.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상은 늘 같다. 참신하고, 관습을 깨며, 비범하고, 틀에 갇히지 않은 사람, 다만 그런 요구는 점점 더 거칠어진다. 책상 위에서 매일 마주하는 현실은 오히려 단조롭게 변해 가는데도 말이다. 참신함은 코드 한 줄에 기록할 수 없고, 비범함은 커밋 메시지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인데, 회사는 그것을 원한다. 그 모순 속에서 지쳐가는 내 마음이 며칠의 나른함으로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결론은 단순한, 곧 이 자리에서 물러날지도 모른다는, 언젠가는 백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불안과 체념이 섞인 웃음이었지만, 이상하게 조금은 가벼웠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면 최소한 웃으면서 상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저녁, 남편이 동네 산책을 하자고 했다. 처음엔 귀찮았지만, 마지못해 이끌려 나가 보니, 의외로 좋은 선택이었다.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하나씩 들고, 동네 다리를 건너 옆 동네까지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발걸음을 맞추며 걷는 동안, 엉켜 있던 머릿속 매듭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무겁게 내려앉던 8월이 물러가고, 불안과 설렘이 동시에 스며든 9월이 찾아왔다. 더위와 싸우며 지치던 날이 지나고, 이제는 다시 자세를 단단히 갖춰야 할 달이 시작된 것이다. 계획표를 새로 짜고, 연말까지 달려야 할 목록을 채우며, 자기 계발의 의무를 다짐해야 하는 달, 그러나 9월의 저녁 바람은 그 모든 결심을 순식간에 무장 해제시켰다. 단단히 세운 마음 위로 스며드는 선선한 바람 한 줄기,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잠시 가벼워졌다.
어쩌면 9월의 자세란 내려놓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버티기 위해 잔뜩 치켜세운 어깨를 내려놓고,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커피 한 모금에 적셔내는 일, 때로는 무장보다 무장 해제하는 용기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해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며,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무엇이든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은 압박, 뒤쳐지면 안 된다는 조급함, 더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이 밀려오지만, 동시에 나는 9월이 고맙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으로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무장 해제를 배운다. 잔혹하게 흘러가는 달력 속에서도 계절은 늘 사람을 위로한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라, 나 스스로 살아갈 자세를 조금씩 찾아가는 것, 그것이 아마도 9월이 내게 가르쳐 주는 진짜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