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빛을 머금고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침이면 긴 그림자가 문지방을 넘어 앞 베란다까지 뻗고, 오후에는 벽 한쪽을 어둡게 물들이며 사라진다. 우리는 그 그림자 속에서 살아간다.
어린 시절 집은 나를 감싸는 둥지였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매일 달라지는 것 같았고,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신기했다. 앞 베란다 너머에는 계절마다 다른 색의 잎이 떨어졌고,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밤이면 자장가처럼 들렸다. 집은 공간이 아니라 내 세상의 중심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집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벽에는 오래된 흔적이 남아 있었고, 문 손잡이는 닳아 있었다. 어린 시절의 책상은 그때보다 낮아 보였고, 한때 아늑했던 방은 생각보다 좁게 느껴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그곳을 채웠던 기억들이었다. 나는 집을 떠난 후에도 자주 집을 그리워했다. 고요한 새벽녘, 바람 소리에 잠이 깨면 어릴 적 내방의 공기가 떠오르곤 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던 창문, 이불속에 웅크린 채 들었던 빗소리, 익숙한 냄새가 밴 벽지까지, 이제는 작은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세계가 가장 따뜻했던 것 같다고 느낀다.
어느 날 오랜만에 집에 들렀을 때,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아파트 현관 앞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는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풍경이 이제는 낯설게 다가왔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 낡은 벽에 비친 그림자, 오후 햇살이 머물다 가는 창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을 기억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집의 그림자는 우리 삶에 드리워진 기억이다. 시간과 함께 흐르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면서도, 우리는 집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그 그림자 속에서 다시 나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