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수프를 끓이며

by 박수진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잘게 썬 양파를 먼저를 볶는다. 투명해질 때까지 달달 볶아주면, 주방에 은근한 단내가 퍼진다. 토마토를 듬뿍 넣고 으깨듯 저어주자 붉은빛 국물이 우러나온다. 여기에 양배추와 샐러리, 브로콜리, 당근까지. 채소들이 한데 모여 천천히 어우러지는 동안, 주방은 점점 따뜻해진다. 토마토 수프는 언제나 뭉근하게 끓여야 제맛이다. 센 불에서 바글바글 끓이면 채소들이 금세 흐물거려 버린다. 약한 불에서 서서히 익혀주면, 각자의 맛이 충분히 우러나와 깊은 풍미를 만든다. 양배추는 달 큰 맛을 내고, 브로콜리는 씁쓰레한 향을 더한다. 샐러리는 국물에 개운함을 불러 넣고, 당근은 은근한 단맛으로 조화를 이룬다. 모든 재료가 한데 모여 각자의 색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진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는 오래전 겨울이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밖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창가에는 하얀 성에가 가득했다. 도마 위에서 채소를 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툭, 툭, 당근을 자르는 소리와 함께 차분한 마음이 따라왔다. 국물이 끓는 동안 주방은 따뜻한 증기로 가득 찼고, 토마토 특유의 새콤한 향이 퍼졌다.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자마자 몸이 사르르 풀렸던 기억, 그날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


토마토 수프를 먹으면 마음이 사근사근해진다. '사근사근하다'라는 말은 꼭 씹을 때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히 느껴지는 질감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나는 이 말이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바삭하거나 푸석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적당한 밀도를 지닌 상태, 서늘하게 식어 있던 마음이 따뜻한 국물을 머금은 듯 촉촉해지는 순간.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마음이 헛헛할 때면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꼭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속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서였다. 한입 떠먹으면 묵직한 국물이 입안을 감싸며 차분한 기운이 스며든다. 빨갛게 끓여 오른 수프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쉬게 된다. 수프의 향을 음미하고, 따뜻함을 느끼고, 한 템포가 늦춰진 호흡 속에서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소한 순간들이 삶을 지탱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작은 위로들 속에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특별한 재료 없이도 냄비에 채소를 넣고 끓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이 토마토 수프와 닮아 있었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사근사근한 마음을 한 그릇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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