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미술여행 후의 달라진 일상의 단상들
엄마표 유럽 워크북으로 다녀온 유럽 여행 전의 우리와 유럽 여행 후의 달라진 우리에 대해 일상의 단상을 정리해본다.
1. 진라면은 라면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는 카피로 유명해진 침대 브랜드가 있다면, 우리에게 진라면은 더 이상 라면이 아니라 작품이 되었다. 오뚜기는 2018년 진라면 30주년을 맞이하여 호안 미로의 즐겁고 유쾌하며 순수한 느낌을 전달하고자 스페인 초현실주의 거장, 꿈을 그린 화가 호안 미로와 협업을 결정하고 호안 미로의 작품 특징인 원색, 점, 선, 면의 단순한 형식을 사용하여 경쾌하고 밝음, 건강, 유머, 리듬 등을 라면 포장지에 담았다.
이 사소한 라면봉지 하나에서 딸아이들은 호안 미로 미술관을 떠올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억 이야기로 이어지니 여행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서로만의 끈끈한 공감대가 생겨났다. 눈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느끼는 깊어진 생각의 농도와 폭넓은 크기는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곳에서 조우하게 된다. 고작 하찮은 라면봉지 하나에서도 말이다.
2. 결이 고운 아이
첫째 아이가 만 4세일 때 있었던 일이다. 과학책을 읽어주려고 표지를 보여준 순간, '잠깐만'하면서 수많은 책이 꽂혀있는 책장에 달려가더니 서슴없이 책 한 권을 뽑아온다.
엄마, 이 책이랑 그림이 비슷해요.
읽던 책과 딸아이가 내민 책은 그림작가가 동일했고, 그림을 표현하는 기법도 동일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책 속에서 그 책을 몇 초도 안돼 찾아온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딸아이의 그림을 보는 관찰력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사람들에 따라 그게 뭐가 대단하냐 싶겠지만, 나는 작가마다 그림을 달리 표현하는 테크닉을 구별하는 것과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것을 읽어내는 관찰력'에 칭찬해주고 싶다. 그런 아이가 커서 유럽 미술여행을 다녀왔으니 그림을 대하는 관찰력과 섬세한 표현력의 결이 고와졌음이 분명하다. 또한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예술적인 경험들이 훗날 자기표현에 있어서도 뛰어난 미적 감각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미술 활동이란, 눈에 의한 시각적 경험 및 정신 활동의 일부이며
미술작품을 인식하는 과정은 자연과학의 실험 계획처럼 동일한 탐구 과정이다.
그러므로 미술도 지성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교육학자 아이즈너(Elliot W. Eisner, 1933~2014)
어렸을 적 나는 예술에 무지했고, 감성적인 것에 무지한 시대를 지내왔기에 우리 딸들에게만큼은 미술이 편안하고 즐길거리로 느껴진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선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모든 길은 그림으로 통한다?
유럽 미술여행 후 아이가 느끼는 세상은 여행 전보다 확연하게 넓어졌다. 보이는 것도 많아지고, 들리는 것도 많아지니 더 이야기하고 싶고 더 배우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 유럽 미술여행을 통해 감상했었던 예술 작품은 그 사회의 오랜 전통과 문화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아 딸아이들은 자연스레 각 나라의 역사에 관심이 가고, 예술 작품 속에 녹아 있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이처럼 세계지리에서 세계사를 넘나드는 폭넓은 지식의 관심사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배워야 해 외워야 해라고 했다면 이토록 자기 주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스스로 무언가가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 졌다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마인드맵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세계지도처럼 펼쳐지는데 이야말로 이번 유럽여행에 있어서 큰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첫째 아이는 5개국 10개 도시 중에서 영국 런던에 대한 인상이 가장 강렬했었나 보다. 미국식으로 귀에 익은 영어 DVD보다 영국식 발음에 묘한 매력을 느꼈고, 그 이후로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사 하나하나를 따라서 하기 시작하고 영국식 발음을 하며 왠지 모를 희열감을 느끼는 듯했다.
저는 옥스퍼드 대학에 갈 거예요.
런던에 사는 것이 꿈이에요.
상관없다. 그게 허황된 꿈일지라도. 옥스퍼드 대학이 영국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만족한다. 아니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겁지 아니한가?
4. 꼭 유럽여행을 다녀와서 그런 게 아니겠지만 놀라운 발전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제일 친했던 친구는 기본적인 학원 외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암기 속독 학원까지 다녔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나름 잘 살았던 걸로 기억된다. 한 번은 그 친구가 다녔던 미술학원을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으로 치면 체험 수업하고 학원 다녀보도록 하는 홍보 식 수업이었던 것 같다) 미술학원의 그 세련된 분위기에 매료되어 집에 가자마자 미술학원을 보내 달라고 엄마를 졸라 댔던 걸로 기억된다. 당시 학원비는 주 3회 5만 원이었고(아직도 기억을 하는 것 보면 어지간히 가고 싶었나 보다) 엄마는 오빠 둘에 나까지 피아노 서예 주산학원에 미술학원까지는 부담스러워하셨다. 주 3회를 주 1회로 가서 학원비를 깎아보겠다 딜까지 제안하며 졸라 댔지만 결국 엄마는 미술학원을 보내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 다니지 못했던 미술학원을 딸아이가 가고 싶다 하면 대리 만족하며 꼭 보내주는 엄마가 돼야지 했지만, 나는 두 딸아이에게 미술학원을 보내준 적이 없다. 딸아이들이 미술학원을 가고 싶어 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엄마표 교육에 일환으로 미술관 전시회를 쫓아다닌 것뿐만 아니라 미술관에서 하는 미술체험을 통해 학원보다 더 나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유럽여행을 다녀오고 몇 달이 지나 교내 코로나 극복 캠페인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있었는데 첫째 딸아이의 포스터가 당당히 최우수작에 선정되었다. 또한 독서평설이라는 어린이 잡지에 둘째 아이 작품이 실리는 쾌거가 연이어 생겼다. 사실 언니의 그림 그리기 소질에 가려져 있어 몰랐던 둘째 아이의 그림 그리기 실력이 남다르다 싶었던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패드가 대문짝 만하게 있는데, 거기서 그냥 슥슥 그린 그림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와올 때쯤, 둘째가 말했다.
“엄마, 저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딸아이 말의 수식어 (너무)라는 단어에 흔들렸고, 그다음 날부터 동네에 있는 미술학원의 커리큘럼을 다 알아보고, 작가 별로 작품을 감상했던 이력을 상세하게 학원 원장님과 상담한 후 나름 까다롭게 고른 미술학원에 체험수업을 먼저 보내 봤다.
그렇게 보냈던 미술학원에서 한 달 사이 일취월장하는 둘째 아이의 그림실력을 보고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나브로'라는 단어가 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우리 아이들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이해했던 수많은 작품 속의 그 미묘한 무언가를 체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아이들이 표현한 작품으로서 그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첫째 아이는 유럽을 다녀온 후 2020학년도 5학년 전교 부회장, 그리고 2021학년도 6학년 전교회장 자리를 당당하게 꿰찼다.
5. 푸르스트 효과 (Prust effect)
항상 유럽 여행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아이들을 재운 고요한 새벽, 다음날 일정을 짜면서 그날 사용한 지출에 대해서 가계부를 쓰곤 했는데, 그때 항상 들었던 프랑스 입체 음악(일종의 프랑스 카페 백색소음)을 들으면 몇 초도 되지 않아 프랑스 파리의 푹 꺼진 이케아 소파가 있던 프랑스 숙소로 나를 이내 데려가 준다.
푸르스트 효과(Prust effect)
냄새 같은 특정 자극이 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현상
유럽에서 ‘살아보는 여행’을 해서 그런지, 아이들 또한 유럽에서 들었던 음악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들리거나 거리 지나가는 빵집에서의 빵 냄새 하나하나에도 유럽에서의 추억에 의미를 두고 곱씹었다. 지금의 코로나 시국에는 감히 꿈꾸지 못할 우리의 생생한 유럽 향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