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 이병률

2020 시필사. 72일 차

by 마이마르스
25.jpg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 이병률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을 한다

존재에 대한 말 같았다

말의 감정은 과거로부터 와서 단단해지려니

나는 단단한 내 손목이 슬프지 않다고 대답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인데도 비를 셀 수 없어 미안한 밤이면

매달려 있으려는 낙과의 처지가 되듯

힘을 쓰려는 것은 심줄을 발기시키고 그것은 곧 쇠락한다


찬바람에 몸을 묶고 찾아오는 불안을 피할 수 없어서

교차로에는 사고처럼 슬픔이 고인다


창가에 대고 어제 슬픔을 다 써버렸다고 말했다

슬픔의 일부로 슬픔의 전부는 가려진다고 말해버렸다


저녁에 만난 애인들은

내 뼈가 여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검어지며 건조해져간다고 했다


손목이 문제였다

귀를 막을 때도 무엇을 빌 때도 짝이 맞지 않았다


손목 군데군데 손상된 혈관을 키우느라 밤을 지새울 예정이다

저 바람은 슬픔을 매수하는 임무로 고단할 것이므로

나는 이제 내 손목에게 슬픔을 멈추어도 된다고 말한다


#내손목이슬프다고말한다 #이병률 #시필사 #펜글씨 #손글씨 #닙펜 #딥펜 #매일프로젝트 #이른아침을먹던여름 #thatsummerwithyou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람과 발자국 - 오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