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친구가 별로 없다. 이렇게 사회성이 떨어지는 성격은 어디 안 가나보다. 매일 운동을 다니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장을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가고, 밥을 먹고- 이 모든 활동을 오로지 혼자서 한다. 그렇다고 미치도록 서글프거나 외롭지는 않다. 오히려 마음 한 구석에서 밀려오는 불안감이나 불편함이 없어서 좋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적이 흐를 때가 있는데, 나는 그 순간을 대체로 못 견디는 편이다. 숨거나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아진다.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관계는 거의 없었는데, 내 마음을 다 드러내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 적막감이 참으로 싫다.
상처 받기 싫어서 나 역시 상처를 주지 않는 쪽을 택하려다보니 본의 아니게 대인관계 기피증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애초에 형성되지 않으면 굳이 그런 상황들이 일어나지 않을테고, 그럼 마음 한 구석은 평온함이 유지될테니까.
가족 간의 관계가 돈독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엄마와 어렸을 때부터 소울메이트처럼 지내와서 그런지, 엄마만큼 내 모든 것을 털어놓는 상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엄마는 내 인생에 유일무이한 절친이자 인생의 멘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관계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남편도 엄마 못지 않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가장 순수했을 때 만나서 인생의 1/3 정도를 함께 해왔기 때문에 내 모습과 상태에 대해 가장 민감도가 높은 존재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것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를 지언정, 겉으로는 웃고 있을 내가 실제로 지닌 감정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인 사람이다. 나를 꿰뚫어보는 능력은 신급인 것 같다.
아이 엄마가 되면 동네 엄마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 줄 알았는데, 나도 정말 나다. 이런 면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듯 하다. 하긴, 사람이 극으로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 하던데 나는 장수할 팔자인가보다. 뚝심있게 외길 인생인 듯 하다. 소울메이트 두 명 정도면 과분하지, 뭐.
근데 이 둘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나를 살게 하는 존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나를 죽게 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해야 하는데 어쩌다 싸우게 되면 남보다 못 할 정도로 싸우고 내 마음과 다르게 상처를 무한대로 줘버리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가족이라서,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줄거란 생각에 더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는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도리어 상처를 어떻게 해서든 주지 말아야 할 소중한 존재에게 더 상처를 주게 되니, 말할 것도 없이 반성해야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항시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두 소울메이트가 부득이하게 부재할 때는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사람들과 만남을 이어가는 게 힘에 겨운 나로서는 별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저 나한테만 집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쓰는 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 한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것이 제일인 듯 싶다. 굳이 누군가의 심상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눌 필요 없이 내 마음의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는 어떤 것인지, 나에게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는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게 더 가치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인관계를 멀리하게 되었나보다.
인생은 주고 받는 것에 연속이다. 그 마저도 스트레스가 된다면 나처럼 속 편히 모든 것을 혼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재미는 없을 지 언정 상처가 남지는 않을테니까. 차라리 나를 보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반려견이 더 좋은 친구가 되어줄거란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가 잘 되었을 때 배 아파하지 않는 존재가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평행선처럼 마음의 선을 유지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