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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민 Nov 19. 2016

인생의 황금기

인간만사 새옹지마, 부모님의 제주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버지와 산소 호흡기. 그리고 절대 놓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새하얗던 입원실의 천장 아래, 우리 세 식구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그 구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고질적인 이명이 심해진 것도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위암이셨다.


 난 울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모님 앞에서만큼은 절대 울지 않았다. 무남독녀 외동딸이지만 응석받이로 키워내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확고한 신념을 잘 알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수술실 문 앞에서의 기다림은 정말인지

두 번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피가 말린다는 표현은 아마 그럴 때 쓰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지금에서야 하는 얘기지만 나는 반쯤 공황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끄집어내려 애써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암세포를 포함한 위의 일부가 절제된 아버지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나오셨다. 어쩌면 그 때가 난생 처음 가장 나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엄마의 세상 다 잃은 표정을 보며, 새삼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 아버지가 왜 가족들에게 무뚝뚝해질 수 밖에 없었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의 삶도 고달프셨을테지. 참고 강인해지지 않으면 가정을 지켜내기 힘들었을테니. 무언의 책임감과 의무감, 그로 인한 압박감이 당신의 마음을 한껏 짓눌렀을테지.


 사실 진정한 당신의 모습을 나는 안다. 엄마마저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수술을 받던 중, 무언가 잘못 되어 평생 휠체어를 탈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재수생 딸내미가 혹여 밥이라도 굶을까, 내가 제일 좋아하던 두부조림을 매일 아침 손수 만들어 놓고 새벽같이 엄마 재활 치료에 가셨던 나의 아버지.


 회복기로 기나긴 시간이 흘렀고, 암흑같던 하루하루가 점차 빛을 보게 되면서 아버지께서도 남은 여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는 계기가 되었을 터. 그 사이 나는 25세가 되던 해에 결혼을 했고 분가를 하면서 부모님과 자주 왕래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가족끼리 제주로 여행을 떠났는데, 아버지께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셨다.



먼저 제주에 집을 마련하고 서울에선 월세로 살거야. 언제고 은퇴하면 뒤도 안 돌아 보고 내려올 수 있게.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 믿어.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지만.



 아버지께선 늘 언행일치 하시는 분이란 걸 알기에 엄청난 결심을 하셨구나 싶어 내심 반가운 마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제주 여러 곳을 누비며 부모님의 두 번째 삶의 터전을 알아보러 동분서주하였다.


 부모님 눈에 제주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자연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늘 그리워하던 흙 냄새와 숲길이 여기저기 수놓아져 있는 제주- 야자수 나무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뿐더러, 습기와의 전쟁은 차후의 문제라며 그닥 신경도 안 쓰실 정도였으니까. 살금살금 피어오르는 곰팡이에 대해서 지금은 또 어떤 마음이실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여쭤봐야겠다.



 그렇게 제주의 구석구석을 면밀히 살펴보고 다닌 뒤 찾은 곳은 동쪽에 위치한 알밤오름 근처의 작은 마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낸 조경이며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속에 둥지를 튼 나무집. 동백나무가 집 주변을 지키듯 빽빽하게 들어서있고 그 아래로 꿩 가족들이 줄을 지어 자유로이 산책하는 환경에 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본래 답답할 정도로 신중해서 엄마의 신경을 자극시키는 아버지의 평소 행동이 이 날 따라 180도 달랐다. 머리 속 체크리스트를 제대로 다 훑긴 하셨는지 단숨에 집을 계약해버리셨다. 어안이 벙벙한 나와 남편은 몇 번 더 왔다갔다 해보고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반문했지만, 부모님은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셨는지 연신 싱글벙글이셨다. 그래, 내 공간이 될 집은 그렇게 보자마자 느낌적으로 와 닿는다더니 어련히 알아서 잘 찾으셨겠지.


 한 동안 부모님께서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제주를 다녀오셨다. 도시 생활을 못 견디게 싫어하셨지만 노후 생활비를 벌려면 일을 해야만 하셨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생활이 아무 기약도 없이 몇 년간 지속되었다. 삶의 터전이 한 순간에 그리 쉽게 바뀔 수 있다면 인간의 인생은 터무니 없이 쉬워지겠지.


 인생은 타이밍- 놓치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기에 절묘한 그 순간을 잘 잡아야 한다. 우리 부부는 부모님 덕분에 제주에 정착하는 게 그나마 수월한 편이었지만, 그 자세한 내막에는 젊음의 패기가 없었다면 다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경우는 그래서, 그렇기에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을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길러서 결혼시키고 난 뒤, 익숙해진 삶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인생 제 2막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모험이 아니고서야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긴 기다림 끝에 부모님은 제주에 내려올 타이밍을 잡으셨다.



 요즘 두 분을 뵙고 있으면 너무나 평온한 상태로 지내고 계신다는 게 느껴진다. 텃밭에 작물들이 잘 자라줘야 할텐데, 저 쪽에는 다음에 어떤 걸 심어볼까, 날씨가 흐려도 바람은 부니 빨래가 잘 마르겠지. 엄마의 목소리가 한 톤 높게 들리는건 내 기분 탓일까?


  서로가 소울메이트인 우리 모녀는 한 번 통화를 했다 하면 아줌마들이라 그런 지 한 없이 수다를 떨기 바쁜데, 그 와중에 엄마가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랑 아빠는 요즘이 제일 평화로운 것 같아.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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