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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민 Nov 22. 2016

다음 생에는

농담 반, 진담 반


 남편과 나는 쓸데 없는 수다가 참 많다. 아저씨, 아줌마가 되기도 전부터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눠왔는데, 고급지게 '담소'라고 하기엔 내용의 알맹이가 알차진 않다.


 그래도 실 없는 얘기 속에서 서로를 많이 알아온 것 같다. 남편이 수다스럽고 말 많은 성격이 아닌데, 둘이 천장보고 누워서 잠이 안 올 때면 새벽까지 주제가 없는 말을 이어간다. 의식의 흐름 기법도 아니고.


 돌이켜보면 나의 대부분 이야기들은 내생(來生)에 대한 것이다. 내게 주어질 지 아닐 지도 모르는 다음 생에 대해서 섣불리 경솔하게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난 그런 상상들로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곤 한다. 누구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서.


 즐거운 상상만으로 그칠 나의 이야기-



 다음 생에 나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영어를 더 열심히 배우고 스페인어도 배울거야. 사실 프랑스어가 듣는 감이 좋긴 한데 말하기엔 입에 버터 한 가득 넣은 느낌일 것 같아서 나랑 안 어울려. 난 욕도 찰지게 잘 할 자신 있어서 철 없는 사춘기 청소년 남학생이 되어 보고 싶어. 불알친구도 만들어야지. 그리고 어떤 여학생이랑 썸도 탈 거고 청순한 긴 생머리 첫 사랑도 가슴에 새겨볼거야.


 대학생이 되면 그 첫 사랑과 꼭 사귈거야. 농활도 가서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 물도 같이 들이고. 실상 거기 가면 어르신들께 막걸리 얻어 먹고 술도 배운다면서. 내가 그런 걸 해봤어야 알지. 교직이수한다고 과방에 틀어박혀서 레포트만 주구장창 썼던 이번 생은 글러먹었어.


 그리고 군대가서 그 첫 사랑과 안녕, 바이, 짜이찌엔 할거야. 미쳤니? 한 여자한테 올인하게. 엄연히 다음 생이라고! 내가 말했잖아. 쓰레기같이 보일 건 아는데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고 다닐거라니까. 아, 이게 상상이었으니 망정이지 어디서 돌 날아올까 무섭다.


 군에서 소위 좀 놀아보신 형님, 아우 만나서 휴가 때 클럽에서 밤도 새볼거고,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면서 해장국 먹고 군에 복귀할거야. 요즘 그 집 선지 해장국 맛있더라, 전에 당신이 사다준 데.


 그리고, 제대 하자마자 복학생 신분으로 신입생 중 제일 예쁜 애랑 사귈거야. 아, 연애 많이 안 해 본 가장 풋풋한 애로. 그래서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연애할거야. 그러다 관계가 권태로워지면 나는 스펙 쌓는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어학연수를 떠날거야. 그래도 예의 상 헤어지고 갈 거야. 내 인생에 금발의 미녀 한 번은 만나줘야 되니까.


 1-2년은 워킹 홀리데이로 유럽 여기저기 여행 다닐거야. 내가 제일 해보고 싶은 게 딸린 식구 하나 없이 나 홀로 해외 여행 떠나는 거니까. 머리카락 색, 눈동자 색, 언어도 제 각각인 아름다운 여인들을 많이 만날거야. 불같이 타오르다 금새 식어버리는 연애도 해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해보고.


 그렇게 여자란 여자 다 만나 보고 살다가 내 인생에 종착역은 당신이었으면 해. 당신같은 여자랑 결혼해서 다시 우리 아들 낳고 잘 먹고 잘 살거야. 그러니 당신은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나서 나를 만나러 오는 긴 여행을 하고 있어. 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 어때, 괜찮지?


 남편은 여전히 이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해주질 않는다.


 쳇...싫으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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