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찬이.
미르의 유일한 친구이자 하나밖에 없는 형이었으며 내가 정말 사랑하고 아꼈던 나의 첫 동물조카.
너무 순하고 착해서 싫은 것이 있어도 싫다고 표현 못하고 꾹꾹 참기만 했던 아이.
힘찬이를 떠올리면 이런 표현들이 먼저 생각난다.
한 달 차이로 형과 아우가 되었지만 같은 해에 태어났기에 둘은 나이를 같이 먹어갔다. 여동생이 결혼하고 나서는 상황이 좀 달라졌지만 그전까지 우리 넷은 자주 만나 시간을 같이 보냈고, 추억도 많이 쌓았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꺼내보고 있자면 '그래, 이런 때가 있었지..' 싶어진다.
다정하고, 편안하고, 젊고, 생동감 넘쳤던 시절.
하지만 시끄럽고 불편했던 시간들도 존재했다.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해야 했던 때가 특히 그러했다.
힘찬이와 미르는 성격이 정반대였고, 당연히 하는 행동도 달랐다. 미르는 자기표현이 확실한 편이라 말도 많았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나 꽁알꽁알 무어라 소리를 내거나 짖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특히 차를 타면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짖어대곤 했다. 어디로 가느냐, 깜박이는 왜 켜냐, 왜 멈췄느냐, 집에 거의 다 온 거 같으니 빨리 내려달라... 차를 세우면 더 흥분해서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다. 하도 짖어대는 바람에 목이 쉬어서 쇳소리가 나오는데도 미르는 지치지 않고 짖고 또 짖어댔다. 아기 때부터 차를 타고 병원에 자주 다녀서 차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 트라우마가 짖는 것으로 나타나는 듯했다.
내가 며칠 집을 비워야 할 경우 여동생에게 미르를 맡기곤 했다. 우리는 사는 도시가 달랐고,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미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날 때도 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나와 여동생은 미르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다. 그러나 차만 타면 짖는 미르의 행동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불가피하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차를 태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그래서였다. 듣는 사람도 괴롭지만 짖는 미르는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미르와의 여행도 중단했다. 미르에게 좋은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건 인간 생각이고, 미르 입장에서는 집을 떠나는 것부터가 스트레스인 것 같았다. 나는 미르와 여행을 가는 대신 집 근처를 자주 산책시키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 자기가 좋아하던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게 미르에게는 가장 기쁘고 가장 편안한 여행일 거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힘찬이는 차를 타면 거기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미르가 광분해서 짖어대니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힘찬이는 싫다는 표현 한 번 내지 않았고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참고 참았다. 미르가 이성을 잃고 날뛰다가 자기 몸을 밟아도 움찔 놀라 피하기만 할 뿐 화조차 내지 않았다.
힘찬이는 참으로 과묵한 아이였고, 눈이 컸으며, 빨려 들어갈 것처럼 눈빛이 깊었다. 그리고 요크셔테리어치고는 덩치가 제법 큰 편이었다. 산책을 나가면 만나게 되는 요크셔테리어들은 다들 작은데 힘찬이는 그 아이들보다 확실히 체구가 크다 보니 여동생에게 견종이 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힘찬이 말이야. 실키테리어 아닐까?"
어느 날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져본 여동생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실키테리어는 요크셔테리어와 오스트레일리안 테리어를 교배해서 태어난 품종이다. 요크셔테리어보다 체구가 크며 털도 은빛이 감돈다고 했다. 힘찬이도 한때는 풀콧으로 털을 기른 적이 있다.
여동생이 보내준 힘찬이의 사진을 보니 인터넷에 올라온 실키테리어들의 사진과 제법 닮아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힘찬이는 실키테리어가 아니었다. 여동생이 힘찬이가 다니는 동물병원 원장님께 실키테리어가 맞는지 여쭈어봤는데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거다.
"크면 좀 어때. 난 묵직해서 더 좋아."
긍정 마인드를 장착한 그녀답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받았던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렸다. 하긴 어떤 품종이냐가 뭐 그리 중요할까. 힘찬이는 힘찬이만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힘찬이는 착했고, 듬직했으며, 의리가 있었다. 그리고 달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산책을 나가거나 어딘가로 여행을 가면 긴 네 다리로 말처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힘찬이 잡자! 힘찬이 잡으러 간다!"
이렇게 외치며 쫓아가는 시늉을 하면 순진한 힘찬이는 검고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는 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주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곤 했는데, 동생이나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다. 자신이 믿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는 힘찬이만의 애정표현이었다. 여동생이 제부와 결혼한 뒤로 힘찬이는 아빠에게도 의리를 보여줬다.
결혼 전부터 제부의 취미는 사진 찍기였고, 카메라를 챙겨 출사를 다녀오곤 했다. 여동생과 결혼하고 난 뒤로는 부부가 함께 전국의 명소를 여행했다. 그 여행에 힘찬이도 함께 할 때가 많았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말처럼 신나게 뛰어가는 힘찬이와, 세상 근심 다 잊은 해맑은 얼굴로 힘찬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여동생을 멋진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건 제부의 부지런한 취미 활동 덕분이다.
내가 미르와 나의 인생샷이라고 명명한 사진들도 제부의 솜씨였다. 사진을 잘 찍는 이모부를 두었으니 얼마든지 더 많은 인생샷을 남길 수 있었으련만, 안타깝게도 미르는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동영상으로 찍어두고 싶어도 카메라 앱을 열면 귀신같이 알고 휙휙 고개를 돌려대거나 하던 행동을 딱 멈추기 일쑤였다. 반면에 힘찬이는 사진 찍히는 것을 제법 즐겼고, 기특하게 포즈도 잘 취해주었다. 그런 힘찬이를 데리고 여동생과 제부는 자주 여행을 다녔다.
제부와 여동생, 그리고 힘찬이. 이들 셋은 언제나 함께였다. 제부와 힘찬이가 추운 걸 극히 싫어해서 눈이 많이 쏟아지는 겨울은 주로 패스했지만 꽃이 피는 봄에는 꽃이 만발한 곳으로, 여름에는 녹음 우거진 숲과 바다로, 단풍 지는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길로 해마다 출사여행을 떠나곤 했다. 요크셔테리어치고는 덩치가 커서 견종이 뭐냐고 질문을 받던 힘찬이는 아빠의 사진 모델로 맹활약을 했고, 한 폭의 그림 같은 제부의 사진들은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제부처럼 사진이 취미인 분들이 여행지에서 힘찬이를 만나면 "네가 그 애구나!"하고 알아보는 분들이 제법 있다고 했다. 나름 모델견으로 인정을 받았던 힘찬이였다. 그러나 아프기 시작하면서 더는 모델견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힘찬이는 당뇨병을 앓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했다. 소변량이 많아지고 물을 많이 마시는 다음 다뇨 증상이 나타났지만 인슐린 주사를 통해 관리가 가능했고, 이때는 엄마아빠와 여행을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2022년에서 2023년으로 해가 바뀌던 무렵, 당뇨병에 이어 발작이 찾아왔다. 백내장이 진행되고 있긴 했지만 앞을 보기는 했던 힘찬이의 두 눈은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 귀도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발작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치매 판정을 받았다. 사람이 앓는 병을 동물도 앓는다. 치매도 마찬가지다. 치매에 걸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노견도 치매를 앓는다. 하지만 힘찬이가 그 병에 걸릴 줄은 사실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긴 누군들 예상할 수 있을까.
치매는 너무 무섭고 슬픈 병이다. 힘찬이는 기억을 잃었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계속 돌았다. 발바닥이 까져서 피가 흐르는 대도 멈추지 못했다. 식욕도 급격히 사라져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다. 고개를 푹 숙인 힘찬이가 야윈 몸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계속 돌기만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일이었다. 치매를 앓는 힘찬이는 예전에 내가 알던 힘찬이가 아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고 검은 눈으로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길고 튼튼한 네 다리로 말처럼 땅 위를 힘차게 뛰어다니던 힘찬이는 거기 없었다. 몇 달 사이에 힘찬이는 완전히 다른 애가 되어버렸다.
가장 충격적이고 슬펐던 힘찬이의 변화는 짖음이었다.
사람도 치매에 걸리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평소 말이 없고 조용했던 사람이 치매에 걸리자 매일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고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것을 치매가 온 뒤에야 표출하는 거라고 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짖음으로 모두 표현했던 미르와 달리 과묵하고 조용했던 힘찬이는 치매를 앓게 된 뒤 매일 짖었다. 15년을 살면서 꾹꾹 참아왔던 얘기들을 한꺼번에 다 쏟아내는 것처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짖었고 하울링하며 큰소리로 울었다. 그 모습이 우리를 더 마음 아프게 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그걸 다 속에 담고 있었으니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래, 힘찬아... 그렇게 다 풀어내고 가...."
여동생은 힘찬이를 안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힘찬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여동생에게 힘찬이는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첫 정을 준 반려견이었다. 제부에게도 힘찬이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착한 개, 듬직하고 의리 있는 아들이었다.
엄마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을 힘껏 뛰어다니며, 멋진 모델견으로 활약해서 엄마아빠의 가정경제에 제법 보탬도 되어주었던 힘찬이는 치매 판정을 받은 지 3개월 만인 2023년 4월 23일 밤, 고통스러운 발작이 크게 온 뒤 엄마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뒀다.
여동생은 힘찬이가 떠난 뒤 펫로스증후군을 심하게 앓았다. 여동생이 있을 때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던 제부는 여동생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나는 나대로 힘찬이를 생각하며 홀로 울음을 터트렸다. 이 눈물들이 흐르고 흘러 힘찬이에게 가 닿았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가 힘찬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힘찬이와의 이별을 얼마나 슬퍼했는지, 지금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 힘찬이는 그곳에서 다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치매를 앓던 힘찬이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그러나 그건 힘찬이의 일부에 불과할 뿐임을 또한 잘 알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껑충껑충 뛰고, 코를 찡긋거리며 이빨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던 우리 힘찬이... 나는 사랑스럽고 멋진 힘찬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술을 전공했고,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동생은 힘찬이와의 추억을 화폭에 담고 있다. 힘찬이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그림으로 남기는 그녀를 보며 미르의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여동생의 그림 덕분에 글을 시작한 셈이다.
지난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아프고 힘들어서 그만둘까 갈등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외의 기쁨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와주었던 동물가족들의 밝고 건강하고 즐거웠던 추억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해주었구나...
이 아이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더 많이 남겨두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누군가 그랬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그 말이 진리구나. 새삼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미르를 어르고 달래 가며 찍어둔 사진과 동영상들 덕분에 미르의 부재로 인한 슬픔을 조금씩 희석해나가고 있다. 나중나중에,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가 남겨둔 사진과 글과 그림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주리라. 그 희망이 오늘도 글을 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