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쓰러운 세월의 흔적
제가 사는 곳은 대중교통이 수도권만큼 발달하지가 않았습니다.
지하철도 없고 버스도 10시반이면 끊깁니다.
그래서 차를 사게 되면 삶의 질이 굉장히 많이 올라가게 되죠.
버스를 타면 1시간 넘게 돌아갈 거리를 자가용으로는 20분 만에 갈 수 있는데요,
그래도 한 번씩 버스를 타고 돌아가며 마음의 여유를 느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삑하고 카드 찍는 소리,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의 그 덜컹거림, 시장 근처에서 짐을 한 보따리 싸서 버스계단을 천천히 올라오시는 할머니가 자리에 풀썩 앉을 때 비로소 시동을 걸고 출발하시는 기사님의 따뜻한 배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학원가 근처에 내리는 교복 입은 학생을 보며 '저 친구 아쿠아맨은 봤을라나..' 라고 생각하며 안쓰럽기도 했다가,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걸어가는 걸 보고 제가 더 안쓰럽다는 걸 느끼며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몇 주 전, 지인들과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오는 길에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탔습니다. 흐르는 취기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어요. 좋더군요. 따땃하니 찜질방 같았습니다. 그런데 10분 정도 지났을까요, 버스가 움직이지 않고 앞에서 뭔가 큰 소리가 납니다.
'아저씨, 왜 세워달라고 했는데 안 세우고 그냥 가요?'
보아하니, 아주머니가 남부시장 근처에서 뛰어오며 버스를 세우려고 손을 흔들었는데 기사님이 못 보고 그냥 출발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자신을 보고도 기사님이 그냥 출발했다고 생각했는지, 굳이 택시를 잡아 돌아오는 버스를 추월해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그리고 기사님께 악다구니를 씁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어이가 없었는지 버스를 출발시키려는 기사님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기 전엔 못 간다며 자동문이 닫히지 못하게 계단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결국 기사아저씨는 아주머니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마치 당연한 권리인듯, 카드를 찍지도 않고 버스를 탑니다.
아주머니는 제일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잠시의 정적, 버스가 출발합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지도, 수그리지도 않고 망부석처럼 그 자세 그대로 꼿꼿이 앉아계십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버스 안은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뭔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어떤 세월을 겪으셨길래, 저리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셨을까.
그녀도 누군가에게 넉넉한 따뜻함을 배달하던 때가 있었을텐데.
어떤 경험들이 그녀를 표독스럽고 옹졸하게 만들었을까.
뭇 남성들의 호감 어린 시선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 전 떨리는 마음으로 꽃단장을 하셨던 때가 있었을텐데.
사랑하는 이성의 고백을 쑥스럽게 받아들이며 풋풋한 연애를 했을 때가 분명 있었을텐데.
최소한의 부끄러움과 쑥스러움도 없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걸 알면서도 본인의 감정을 여과 없이 토해내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습니다.
조용한 버스 안, 어느새 제가 내려야 할 정류장입니다.
내리면서 마지막으로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미동이 없는 뒷모습.
저는 내렸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습니다.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 악다구니를 쓰던 아주머니의 모습과 망부석처럼 미동이 없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아주머니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미동이 없는 뒷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본인이 살아온 세월의 옳음을 증명하는 본인만의 방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월 초, 날씨가 참 추웠던 평일 저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