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융통성
몇 달 전, 친구와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습니다. 몇 주 전부터 잡힌 약속이라 스케쥴을 미리 비워놓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급히 학원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조금 늦을 거 같다고 연락이 온 겁니다.
조금 짜증이 났지만, 늦게 입사해 아직 한창 눈치를 볼 시기인 친구의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었던 에어팟을 다시 꺼내 귀에 꽂고 노래를 틀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추천해서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만 해놓고 한 번도 듣지 않았던 Lauv의 Paris In The Rain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음악만 들었을 뿐인데, 어느새 짜증났던 감정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비트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로 넘어갈 무렵, 친구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려 해봤는데 안 될 거 같아. 진짜 미안하다.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상하게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감미로운 노래를 들으며 근처 교보문고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 덕분에 많은 책들을 훑고 또 좋은 문장들과 경험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집에 일찍 들어가 푹 쉴 수 있었어요.
집에 오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진짜 미안하다고, 나도 정말 시간 맞추고 싶었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저도 웃으며 나도 덕분에 책도 읽고 집에 빨리 와서 쉴 수 있었는데 배는 고프니까 다음에 맛있는 거 사달라고 얘기했습니다. 진짜 괜찮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나도 다음에 그럴 거라고 웃으며 얘기하니 친구도 고맙다고 하며 웃더군요.
제가 짜증이 났던 이유는 갑자기 붕 뜬 시간에 대한 대비 부족이었던 거 같습니다. 친구의 갑작스런 야근은 제가 조종할 수 없는 거고, 짜증을 낸다고 해봤자 서로의 마음만 불편해지지 변하는 건 없으니까요.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우연히 흘러나온 좋은 노래가 제 시간을 충만하게 채워줬고, 우연히 시간을 보내러 간 교보문고에서 좋은 문장들을 수집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짜증나고 화나는 감정에 매몰되어 그걸 상대방에게 배출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융통성을 발휘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 순간, 저에게 우연히 찾아온 감미로운 노래처럼, 마음을
건드렸던 우연히 읽은 책의 글귀처럼, 여러분도 그런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