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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창 May 27. 2020

아버지, 오래 오래 행복합시다.

사랑해요.

설암 2기입니다. 제가 100% 살릴  있습니다.’
  전부터 아빠가 계속 목이 아프다고 했다. 칼칼하다고, 숨을 삼킬 때마다  돌을 목구멍으로 밀어 넘기는  같다고.

60여년을 둔감하게 살아왔고, 몸이 상하는 것도 모른 , 무식할 정도로 정직하고 단순하게 일만  왔던 아빠였기에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예민한 엄마의 성화에  이기는   근처 동아대 병원을 들렸다.

민창아.. 느그 아부지 불쌍해서 우야노..’
어머니는 계속 우셨다. 해외여행    가고 개미처럼 일만 하며  아빠.  담배도  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아빠가 암이라니.

‘3기란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데..’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상황에서 짜증을 내면  된다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 괜찮아요. 아빠 괜찮을 거야라는 뻔한 말도  되는 위로나,
엄마. 우리 기도하자.’같은 말을 뱉고 싶지 않았다.

  저녁, 연차를 쓰고 집으로 내려갔다. 집은 줄초상 분위기였지만, 아버지는 태연했다. 애써 덤덤한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삶에 대해 초연해보였다. 집에 들어가자 할머니, 할아버지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손을 잡고 우셨다. ‘민창아. 우야노..’

아버지  선고  . 가족이 온통 슬픔에 잠식되어 정신없이 지나갔다.

다음 ,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에 연락을 해본다. 암은 무조건 서울로 가야 된다, 아산 병원에 용한 의사가 있다더라, 병원은 최소 5 이상 가봐라.

어머니는 이리 저리 전화를 돌리며 정신없이 정보를 수집했다.
 와중에도 아버지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본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태연한 모습에 급작스레 짜증이 솟구쳤다.

아빠, 지금은  아프나?’
아버지는 씨익 웃으며 ‘지금은 그래도 괜찮데이.   아플 때도 있고.’ 하며 애써 담담한  말했다. 그래  그랬지. 대책 없는 무한 긍정.

고등학생 때부터 집에서 떨어져 나와 살아, 부모님의 영향 밖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연락하는 횟수도 줄고 연결되어 있는 감정의 선도 얇아졌다.

부모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겉으로는 ‘효자, 효녀라며 아낌없는 칭찬을 보냈지만 실제로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 그들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

 직장의 배속지를 선정할 때도 성적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근처 좋은 곳이 아닌, 꽤나  곳의 배속지를 골랐고,  덕분에 어부지리로 좋은 배속지를 얻은 친구는 ‘민창아, 그래도  가까운  좋지 않아?’라며 물어봤다가,

자신의 질문이  결정을 바꿀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예상했는지 금세 ‘그래도 타지 생활도 나름 매력 있을  같네.’라며 황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혼자가 좋았다. 밥도 혼자 먹고, 영화도 혼자 보고, 책도 혼자 보고, 사색도 혼자 하는 그런 시간이 결코 외롭거나 적적하지 않았다.

아들이 보고 싶으셨던 부모님은 가끔 ‘언제 내려오노?’라며 섭섭한 진심을 전하셨고, 나는  ‘다음 달에   내려갈게요.’라며 전화를 황급히 마무리하곤 했다.

그런 시간들이 알게 모르게 얇은 단절의 막을 형성하고 있었고,  얇은 막이  10년의 시간 동안 굉장히 견고해지고 두터워졌다는  알게 됐다.

내가 자주 연락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그렇게   아닌가라는 뻔한 죄책감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 곁에서 ‘지금은 어때요? 괜찮아요?’라고 앵무새처럼 묻는 것밖에   있는  없었고, 심지어 며칠간 아무 것도  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놀람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적응으로 적응에서 권태로.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고 가족들은 점점 아버지가 암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가슴에 안은 .

모든 인맥을 동원해, 서울아산병원에 용하다는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 예약을 했다. 우리가   있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창아, 기도해라.’라고 말하는 엄마에게도 화가 났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달라질 거였으면 진즉 달라졌겠지. 교회에서는 누구보다 밝게 웃으면서 집에 오면 가시 돋친 말로 내게 상처를 줬던 위선적인 엄마의 모습, 모태신앙이었던 내가 지금은 신을 믿지 않는 데는 엄마가  몫을 했다.

1주일 , 아버지는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아산병원은 정말 컸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애쓰지만 누군가는 삶을 포기할  밖에 없는 .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찾고, 수많은 사람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

예약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옆에, 입을 들어낸 환자가 있었다. 꽤나  수술을   같았다.  환자를  아버지는 담담했던 부산에서와 달리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해보였다.
본인이  환자처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눈으로 목도해서 그런  수도 있겠지.

처음으로 손을  잡아드렸다. 그냥, 내가   있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아버지의 손은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권재상님, 들어오세요.’

괜찮아요. 아빠. 좋은 결과 있을 거야. 기도했잖아.
신을 믿지도 않으며 아빠를 안심시키려고 신을 찾는 모순.

우리나라 최고의 설암 전문가 의사선생님은 MRI결과를 보고 아버지에게 ‘ 정도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셨다. 어머니는 의사선생님에게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아버지의 들썩이는 어깨. 많이 힘드셨죠. 태연할 수가 없죠.  십년간 내가 봐온 아버지의 모습  가장 약한 모습.

아버지가 처음 암을 선고 받은  어느덧 1 6개월이 지났다. 힘든 방사선 치료도  끝내셨고, 정기 검진을 받으러 종종 서울에 올라오시기만 하면 된다.

마침 어제가 정기 검진일이었고 아버지는 아산병원으로 올라오셨다. 식사를 같이 하자고, 회가 먹고 싶은데 엄마 때문에 아무 것도  먹는다고,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극성이라고 툴툴거리는 아버지.

검진이 끝나고 잠실나루 근처에 횟집에서 말없이 회를 함께 먹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아들 보니 좋네.’
씨익 웃는 아버지를 보니 나도 덩달아 씨익 웃게 된다.

그래요. 이렇게 아무  없이 평온하고 행복합시다. 아프지 말고. 종종 아버지가 좋아하는 회도 같이 먹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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