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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창 Jul 15. 2018

정규직과 비정규직

산소같은 여자

1990년대 후반이었을까, ‘산소같은 여자’라는 타이틀의 CF는 타이틀 이상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산소’와 ‘여자’라는 각각의 단어에서 나오기 힘들지만, 그것들을 엮으니 또 나름 괜찮은. ‘산소같은 여자’라는 타이틀은 도발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드러내는 광고였다. 모델의 얼굴만 중요시하던 화장품 광고에서 벗어났다는 것부터 굉장히 신선했다. 무엇보다 그 광고의 느낌을 잘 살려준 것은 이영애라는 신성 모델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군대다. 고등학교때부터 진로가 정해진 덕분에 자의와 상관없이 꽤 긴 군생활을 해야하긴 했지만, 그 대척점에는 안정성이 있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자의와 상관없는 안정성이라니. 여튼, 나는 내 능력과 스펙에 비해 괜찮은 대우를 받고 있다. 허나, 장기복무 심사를 보지 않은 초임하사나, 장기복무 심사에 떨어져 몇 년의 군생활 끝에 제대를 기다리는 짬이 좀 되는 하사들의 미래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급여에서도 장기복무에 선택되어 중사로 진급한 동기와, 장기복무 심사에 떨어져 하사로 머물러있는 동기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고 자조적인 웃음을 짓긴 했지만. 소위 말하는 ‘비정규직’에 속한 하사들의 생활은 윤택하지 못했다. 토익 점수와 자격증을 취득해놓고도 자신의 특기에 장기복무 자리가 나오지 않아 6년의 군생활을 하고 제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누가 봐도 일을 열심히 하고 인간관계도 좋은 친구였지만, 한 끝 차이로 장기복무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불합리함과 초조함, 그리고 서러움은 하루 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응어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고착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90년대에 10대를 보냈던 소년, 소녀들은 미래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그려봤을까?
다시 말해, 자신이 20~30대가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이 자신 앞에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지금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 ‘지금 세상이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느냐?’라는 물음에 확실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물론 기술이 발전하고, 조금 더 열린 태도와 몇 번의 격동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성숙해왔겠지만.

요즘은 덜하지만 몇년전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들을 볼 수 있는 광고는 화장품광고가 아니라 아파트광고였다.

수 없이 많은 아파트 광고에 나왔던 연예인들의 모습이 하나 둘 떠오른다. 유럽의 정원 같거나, 영화의 한 장면 같거나, 여신의 컨셉이거나.


보통 힘겹게 저축해서 가족이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뿌듯함을 앞세운 공감의 마케팅보다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보여주고 그 신기루 같은 판타지로 빠져들게 하는 그런 컨셉이었다.

이영애를 S급 스타로 확실하게 발돋움하게 해 준 드라마는 아마 대장금일 것이다.
대장금에 나오는 이영애는 힘이 넘치고, 능동적이며, 파란 만장한 스토리 속에서도 존재감이 확실했던 배우였다. 게다가 로맨스를 넘어선 여성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영애의 이미지로 남은 것은 ‘자이’의 광고에 나왔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여신같은 외모의 눈빛이다.


요즘 내게는 젊은 시절 ‘산소같은 여자’의 눈빛이 더 신선하게 느껴지고 그리워진다.
대장금에서의 정의롭고 총명스럽던 그녀의 힘이 넘치던 눈빛은 ‘자이’의 흐리멍텅한 눈빛보다 훨씬 더 매력있었다. 세상에 쪼들리고, 초췌해진 삶 속에서 한때나마 가졌던 꿈이 얼마나 멋진 것이니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최근에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던, 4년을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후배가 ‘정규직’이 되었다. 많은 불합리함을 그저 성실함으로 이겨냈던, 30%가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정규직으로 전환된 후배였다.
마냥 순하게만 보였던 후배의 눈빛에 어느 순간부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10대 시절 꿈꿔왔던 완벽한 미래는 아닐지라도, 인생의 작은 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리라.
그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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