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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May 26. 2020

먹다 : ‘부재’와 ‘허기’가 바꾼 오랜 나의 편식생활

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집 근처 생협에 장을 보러 갔다. 정육 코너에서 국거리용 소고기를 고르고 있는데 삼계탕용 생닭이 눈에 띄었나 보다. 아빠가 한국에 올 때면 가끔 먹는 치킨을 좋아하는 아이는 요리되기 전의 닭이 신기했는지 반색을 하더니 사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찾아보니 부위별로 손질된 상품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아이의 부탁에 못 이겨 장 바구니에 넣고 말았다. 여태까지 한 번도 직접 손질해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주말 동안 ‘저 녀석으로 무엇을 할까?’ 하는 숙제가 돌덩이처럼 마음을 눌렀다. 이런 엄마 속도 모르고 놀러 온 이십 년 지기 친구에게 아들은 “우리 냉장고에 닭이 있다”라고 천진하게 자랑했다. 나의 요리 실력과 닭에 대한 사적 감정을 잘 아는 친구는 껄껄 웃으며 “큰 결심 했네” 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엄마의 손에서 치킨이 짠하고 만들어질 줄 아는 아들은 한껏 기대했지만 막막함 말고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통기한은 슬금슬금 다가왔고 요리든 냉동이든 결단을 해야 했다. 닭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한 채 사십 년을 훌쩍 넘게 살아왔기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대로 호기롭게 부위별로 분해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고난도의 도전이었다. 서툰 요리 솜씨 때문에 일부러 무딘 칼을 쓰는데 기름기 머금고 질긴 껍질 때문에 자꾸 칼날이 미끄러지며 잘 들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닭 뼈가 온몸을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왜 그때서야 깨달은 것일까? 다리 두 쪽이 너덜너덜해진 닭만이 덩그마니 도마 위에 놓여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좌절부터 한 나는 위생 팩을 꺼내어 닭을 포장한 뒤 다시 냉장고에 넣어버리고 말았다. 호기로운 도전은 닭에게 백기를 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국 월요일 출근하신 친정엄마의 손을 빌어 닭볶음탕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 천진스레 자신을 따라가던 나를 외가의 흙 마당을 자유롭 게 돌아다니던 민머리의 갈색 무법자, 암탉 ‘쪼쪼’가 쪼았다고 한다. 충격이 뇌리에 새겨졌던 것일까? 매 방학 외가에 가서 닭을 볼 때마다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닭뿐만 아니라 오리 며 새가 다 무서웠다. 고기도 먹기 싫었다. 그것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체세포를 바꾸고 피부를 닭살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지금이야 못 먹는 게 거의 없어졌지만 타고나길 예민하고 비위가 약해 편식이 심했다. 어쩌면 내게 예민한 유전자를 물려준 호모 사피엔스 조상은 낯선 음식에 대한 매우 신중한 판단으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마이클 폴란의 동명 제목 책에서 따옴)를 해결하며 살아남은 이였을지도 모른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대에는 낯선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면 수많은 이들의 경험이 누적된 식문화가 형성된 지금은 그 반대가 된다. 개인의 성장과 발육 같은 영양학적 문제는 물론, 식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에서 심각한 사교적 어려움과 스트레스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나는 수많은 음식, 특히 닭을 못 먹는 채 스무 살을 맞이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 치맥이 사교 관계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모두가 치킨을 사랑했다. 맥주에는 무조건 치킨이 따라왔다. 불변의 법칙 같았다. 사람들은 치킨 못 먹는 나를 안타깝게 여기며 먹어보라고 거듭 권했다. 하지만 오랜 트라우마는 쉽사리 깨어지지 않았다.


당시 주로 활동하던 곳은 대학 방송국과 단대 축구 동아리였는데 90년대의 사회 분위기와 위계가 분명한 조직의 특성상 군대나 회사생활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술만 권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안주까지 정해주었다. 물론 편식이 나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몇 살 차이가 나지도 않은데 인생을 이미 다 아는 듯 훈계를 하는 선배들로부터 지적과 놀림을 받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조각받아 들어 겨우 몇 입 먹는 척하다가 슬쩍 내려놓고서는 곁들여 나오는 절임 무만 포 크로 찍어 먹고는 했다. 학년이 올라가며 즐기지 안는 음식을 억지로 먹으며 잔소리까지 듣는 부담은 자연스레 사라졌고 다른 메뉴도 시킬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더불어 양파를 먹지 않거나 계란을 앞 접시에 덜어내는 후배들에게 “네가 애냐? 이런 것도 못 먹게”라는 말을 하지 않는 선배가 되었다.   






닭에 대한 오랜 공포와 편견이 깨진 것은 일본 생활을 통해서였다. 교환학생 당시, 해외교류 활동에 참가하는 지역 가정에 방문해 1박 2일을 한 적이 있었다. 학교 차원에서 실제 일본인들 의 삶을 간접 체험해 보라는 취지로 마련한 행사였는데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본식 가옥의 구조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고, 목욕문화나 가정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저녁 식탁에서 치킨 가라아게를 먹었다. 딱 봐도 ‘나는 닭이로소이다’하는 외양을 가진, 치킨과 다를 바 없는 음식이었지만 먹어보라고 권하는 호스트의 권유에 마지못해 한입 베어 물었 다가 ‘음, 맛있는데’ 했다. 뼈가 없어서 닭이라는 실감이 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매일 공동주방에서 싼 재료로 급히 만들어서는 선 채 먹어치우기 바빴던 한 그릇 음식에 비해 그 날의 저녁식사는 행복했다. 따뜻하고 정성 가득하며 풍성했다. 엄마의 식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일상적으로 누려왔던 당연함의 부재는 때로 마주하는 작은 환대와 풍요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한다. 그 따스함이 그리워서 마음의 허기가 질 때면 가끔 이자카야에 들러 치킨 가라아게를 시켰고 서서히 닭을 먹기 시작했다. 비록 마침 매운 닭 열풍이 불어서 매운 걸 잘 못 먹는 나는 또 뒤처지게 되었지만 두 조각 정도는 느리게나마 먹을 수 있게 됐다.


낯선 환경에 놓이는 일이 잦아지면서 서서히 다른 편식 생활도 슬기롭게 해소되기 시작했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와 휴학 후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하던 시절, 모 대기업이 운영하는 면세점에서 일한 경험도 한몫했다. 하루 종일 서서 화장품을 팔려면 힘이 들었다. 잘 먹어야 했다. 먹고 싶은 것만 먹고는 버틸 수 없어서 구내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리고 2-30대에 혼자서 다녔던 여러 번의 배낭여행은 오랜 편식의 습관을 깨고 낯선 세계의 음식에 조금씩 나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현지에 가면 현지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는 명제를 실천했다고 해서 그곳과 사람들, 문화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나의 만족에 머물 뿐이었다. 그러나 편식의 유혹을 누르고 한번뿐인 경험에 도전했더니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 도전은 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처음 맛보는 향신료와 매운맛에 혼이 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는 재료가 듬뿍 들어가 있어 후회도 하고 실제로 배탈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지라는 시공간이 주는 특별한 순간, 습관으로부터의 일탈은 일회성으로 끝날지라 도 여행의 기억이 더해진 특별한 맛의 추억으로 남아 여운을 주었다. 그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며 나의 편식 생활은 잡식 생활로 천천히 바뀌었다.


이 작은 변화는 와인과 사진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더 단단해졌다. 생굴이라고는 비려서 입에도 대지 않던 내가 샤블리라는 와인과 함께 곁들인 레몬 소스 뿌린 생굴의 맛을 즐기게 되었다. 주말마다 깜깜한 새벽 집을 나서 전국을 쏘다니며 사진을 찍던 시절, 점심을 해결하는 식 당은 현지 맛집이 대부분이었다. 제철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다양하게 먹어보며 맛과 향에 민감한 성향은 좋은 방향으로 더 민감해졌다. 한국기행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음식에 깃든 사람들의 삶과 정성을 가벼이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며 타고난 맛에 대한 예민함은 도리어 미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이제는 사내 식당 밥에서부터 미슐랭 쓰리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의 식사까지 아우르는 식습관을 갖추게 됐다. 무엇보다 항상 한 끼를 감사히 잘 먹을 수 있는 태 도를 갖추고, 음식을 한 끼 때우는 목적으로 가벼이 여기지 않고 삶의 중요한 즐거움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회화에 따른 다양한 경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허기’와 ‘부재’가 큰 몫을 했다고 여긴다. 홀로 떨어진 타향, 무엇을 먹어도 자꾸만 배가 고팠던 것은 떠나 온 세상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없거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맞닥뜨리는 우연한 친절, 따스한 식사 한 끼는 그 허기를 채우며 시린 마음에 체온을 0.5도 올려주는 느낌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거듭되면서 한정된 음식의 세상과 경험에만 갇혀 있던 나는 조금씩 밖으로 나갔다. 다른 세상에 속했던 음식이 어느 날 불쑥 내 세계로 들어오며 더 이상 낯설고 혐오스러운 무엇이 아닌 삶의 일부이자 추억이 되었다.

 

닭에 대한 공포는 이미 오래전, 세월에 희석되어 사라졌다. 여전히 나는 굳이 치킨이며 삼계 탕, 백숙 등을 원해서 먹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맛과 분위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비록 실패했지만 해 보지 않은 요리에 도전할 용기도 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 많은 음식을 가렸지만 20대 이후의 경험이 40대의 내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 준 덕분이다. 


먹는 것은 살아가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어떤 면에서 는 경험의 총체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이 걸려 그것을 서서히 체득한 40대의 나는 또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음식을 먹으며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삶의 부재와 허기를 위로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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