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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Jul 21. 2020

첫 월급의 추억

후회스러운 실수를 실패로 단정 짓지 않기

개나리와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차가운 공기 속에 봄기운이 섞였다.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는 설렘과 함께 찾아든 열아홉의 봄이었다. 막 대학 신입생이 된 나는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감정을 오가며 거대하고 낯선 대학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지만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머물 수 있는 공간과 사람들이 생기고 수업에도 적응하기 시작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혼자 먼 지방으로 대학을 간 친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고민 끝에 겁 없이 다른 친구에게서 60만 원을 빌렸다. 당장 급하지 않다고 흔쾌히 빌려주었다. 60만 원이면 지금 나의 두세 달 용돈이다. 20여 년 전의 대학 신입생에게도 거금이었다. 힘겹게 구한 돈을 친구에게 건넸다.


순진하게 돈을 빌려준 대가는 컸다. 언제까지 돈을 갚겠다던 친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몇 번을 연락해 보았지만 꼭 갚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돌려받지 못했다. 돈을 빌린 친구에게서도 언제 돈을 받을 수 있겠냐는 간절한 독촉이 계속되었다. 푼돈을 조금씩 모아보았지만 많이 부족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친구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일을 구했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가의 한 카페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5시부터 11시까지 일하고 월급 30만 원을 받을 예정이었다.


병맥주를 팔긴 하지만 차를 위주로 하는 카페라 힘든 손님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자기들끼리 찾아와 무언가를 한참 이야기하고 차나 맥주를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다 가는 식이었다. 나는 매뉴얼화된 동작을 반복하면 됐다.


누군가 금속 프레임으로 장식된 유리문을 밀면 함께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씩씩하게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인원수에 맞춰 물을 준비하고 메뉴판과 함께 자리로 찾아간다. 주문을 받고 돌아와 음료를 만든다.


예쁘게 담아내어 주문에 맞춰 음료를 테이블에 올려 돌아온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나가면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친절하게 인사하고 사용한 컵을 걷어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한다. 물 빠진 컵을 깨끗한 마른 수건으로 닦아 쓰기 좋게 놓는다. 마감 때면 주방과 화장실 청소를 한다. 머리를 전혀 쓸 필요 없는 단순하고 명쾌한 작업이었다. 종종 나이 든 주인의 잔소리가 흥을 깨긴 했지만.




그는 퇴직 후 카페를 했는데 먹고사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며 요즘 젊은이들이 곱게 자라 세상을 모른다는 말을 툭툭 던졌다. 걸레 짜는 걸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마치 젊은 게 문제라며 싸움을 붙이는 듯했다. 요샛말로 '라테는 말이야.'를 반복하는 아재였다. 왜 대학가 젊은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내겐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


얼마 안 가 혼자서도 일을 쳐낼 수 있게 되었는데 마감 때면 와서 여기저기 지적을 하면서 열심히 일한 사람의 김을 세게 만들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로만 나를 가득 채워도 모자란 나이였다. 탱탱한 마음의 탄성을 누렸던 스무 살이었다. 그런 것들은 이내 잊혔다.


카페는 전면이 큰 통창이어서 밤이 되면 맞은편 건물의 네온사인과 거리의 풍경이 내다보였다. 찾아오는 가을, Sarah Mclachlan의 <Angel> 같은 음악이 카페에 울려 퍼지면 몇 시간째 서 있는 다리의 아픔이나 주인의 끊임없는 잔소리도 다 잊고 음악을 타고 내 마음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두 달이 얼른 지나 돈을 갚고 자유를 찾은 뒤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리기도 했고 돈을 빌려간 친구가 미안하다 사과하며 돈을 돌려주는 상상도 했다. 그러다 열리는 문과 함께 종소리가 울리면 현실로 돌아왔다.


저녁이면 메여있는 신세라 가끔 친구들이 반가운 발걸음을 해 주었다. 때로는 친구들이 손님의 전부라 왔다 갔다 하며 짧게나마 수다에 동참하기도 했다. 가끔은 일이 끝날 무렵 찾아온 친구들과 늦은 시간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고민을 심각하게 나누었다. 달콤 쌉쌀하게 흘러간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체험 삶의 현장'은 끝이 났고 약속된 두 달이 되었다. 나는 일을 그만뒀다.




photo by Alexander Mils@unsplash


 달의 피 같은 월급을 받아 그대로 친구에게 보내려다 10만 원을 빼두었었다. 친구에게는  돈의 일부를 먼저 보내고 나머지 달에 돈을  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일을 그만두고 받은 월급을 친구에게 보냈다. 잠을 설칠 정도의 미안함과 죄책감, 원망, 배신감 같은 감정들을  돈과 함께 모두 흘려보냈다.  월급을 그렇게  써버리면 너무 서글플  같아 계획해  일을 하러 외출했다.


처음으로 남의 잔소리와 자화자찬을 들어가며 번 돈이니만큼 의미 있는 일도 조금 하고 싶었다. 선물을 하기로 했다. 내가 왜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진짜 이유를 모르고 철들었다고 좋아한 엄마를 위해서였다. 오래 남을 물건을 고민하다 금반지를 골랐다. 카페 맞은편에 있는 귀금속 가게에 들어갔다. 얇은 금으로 된 프레임이 사선으로 손가락을 감싸고 중간에는 인조 다이아가 박힌 심플한 디자인을 골랐다. 가진 돈에 맞춰야 했지만 마음에도 들었다.


점원은 조그마한 미색의 작은 상자에 반지를 넣고 광택이 나는 흰색 굵은 리본으로 두 번 둘러 매듭을 지어 앙증맞은 종이 패키지에 담아 건넸다. 반지를 받아 들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 엄마가 좋아하셨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그렇지만 그 반지는 요즘도 종종 엄마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다. 가끔 스무 살 대학생의 눈으로 고른 반지가 촌스러워 엄마에게 끼지 말라고 말해보지만 여전히 그것을 하신다.


그로부터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그냥 돈으로 드렸던 것 같다. 오랜 구직생활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였고 깊은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넸지만 순수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고 그 감정 때문에 소중한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했다. 자격지심을 채우느라 과한 소비를 일삼았다. 당연히 첫 월급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았고 무엇을 했는지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친구에게 돈을 떼이고 내가 쓰지도 않은 빌린 돈을 갚느라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열아홉의 어린 나였다면 서른한 살의 늦깎이 신입사원인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피하지 않고 새로운 생활을 선택해 열심히 노력했고 돈을 벌지 않았냐고. 적어도 겁쟁이처럼 피하지는 않았잖냐고. 그러니 상심은 접어두고 의미 있는 일 하나쯤 해 보라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흐르지 않아도 의미 부여할 가치가 삶에는 충분하다고.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딱 원하던 삶을 갖추지 못했다며 한탄하느라 중요한 것을 놓칠 뻔한 내가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고 더 상처 받을 뻔한 나를 본다. 후회막심인 어떤 과거의 선택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겁도 없이 돈을 빌리고 빌려주었던 열아홉의 그것처럼.


하지만 실패는 아니었다. 그때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의미를 남겼다. 엄마의 손가락, 그리고 내 마음에. 서른다섯의 그 선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수였을지언정 아직 실패로 단정 짓기는 이르다. 그것을 대하는 내게 달렸다. 아직 진행 중인 선택의 과정 속에서 생각한다. 언젠가 이 시기를 돌아보며 서른 하나 가을의 첫 월급처럼 모호한 기억만이 남지 않기를. 삶에 의미 있는 선물로 차곡차곡 채워가는 시간이기를. 그렇게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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