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이름은빨강 Jul 13. 2020

타다만 생일 축하 촛불의 난리법석

어떤 가족사진

엄마의 생신날이 다가왔다. 윤달 때문에 평소보다 늦어진 생일이었다. 무엇을 할지 며칠 고민했다. 할 수 있는 음식이 뻔한 데다 퇴근하고 오면 간단한 데우기라도 엄마의 손을 조금은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외식하기로 결정했다. 뭐 드시고 싶은지 물었지만 늘 그렇듯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엄마다. 결국 아들이 원한 피제리아의 음식으로 결정됐다.


실제 생신날은 며칠 뒤 토요일이었기에 금요일 연차를 내서 하루 육아 휴가를 드리고 목요일 친정 식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 들기름에 소고기를 볶고 미역을 풀어 국을 끓이고 불고기 거리에 색색깔의 알록달록한 채소를 썰어 재워 가져 가실 수 있게 만들었다. 손수 지은 밥 한 끼 못 챙겨드리는데 대한 죄송함을 조금이나마 덜어 보았다. 퇴근길,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고 양초도 받았다. 그리고 스튜디오로 가서 간단하게 가족사진을 찍었다.


지난 4년 내내 아이의 생일이 지나고 한 달 즈음되면 청명절 연휴를 맞아 남편이 일시 귀국했다. 자라나는 모습을 제대로 된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셋이 같이 매년 가족사진을 찍어 왔다. 올해는 코로나로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신 친정 식구들과 가족사진을 남기기로 했다. 스튜디오의 열기를 내뿜는 조명 아래 입꼬리와 광대뼈의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을 의식하며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았다. 다섯이 함께 모여 사진을 찍은 것도 아파트 입주 사전점검 때였으니 어느새 3년 만이다.


모두 다 함께 모여서 한 컷, 엄마와 아빠 따로 한 컷을 건지기 위해 수없이 많은 셔터가 터졌다. 경기 중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셔틀콕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눈에 맞은 뒤 1초 단위로 눈을 깜빡이는 습관을 얻게 된 엄마, 화가 난 건지 실망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졍으로 늘 초기화되는 동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결과물을 확인하니 사진사는 모두가 만족스러울 표정은 끝내 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색하게 웃거나 지나치게 긴장했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으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표정도 보였다. 이벤트가 그저 어색한, 순간 포착된 우리의 솔직한 모습들이었다.


그쳤던 비가 다시 부슬거리는 거리를 건너 예약해 둔 피제리아로 갔다. 아이가 두어 번 먹어보고 좋아하게 된 동네 맛집이다. 미리 예약을 해 뒀지만 저녁의 가게는 많이 붐볐고 그 뜻은 오너 셰프 혼자 요리와 서빙을 다 하는 이 집에서 꽤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지겨움과 호기심에 종종 셰프를 확인하러 가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고 위는 동그랗고 아래로 내려가며 좁아지는 팔각형의 단단한 유리잔 속, 차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물을 홀짝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대화도 지겨워갈 때 즈음 음식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치즈와 채소가 잘 어우러진 피자와 꿀이 담긴 조그마한 소스 그릇이 도착했다. 피자 위에 꿀을 골고루 뿌린 뒤 배고픈 아기새에게 먹이 주듯 하나씩 덜어주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다진 고기를 토마토소스에 조려 트러플 오일로 마무리한 파스타와 계란 노른자와 품질 좋은 후추로 맛을 낸 까르보나라가 이어 나왔다.


예약해야만 맛볼 수 있다는 함박 스테이크도 나왔다. 큰 접시 중간에 동그랗게 놓인 함박 스테이크 주위를 칠리소스와 적절히 배합된 토마토소스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형적인 한국인 입맛의 소유자인 아빠에게 그나마 맞았던 것일까? 새콤하게 시작되어 매콤하게 마무리되는 소스와 밥을 천천히 다 비우셨다. 조금 부족한가 싶어서 추가로 시킨 마르게리따는 아이에게는 만족스러웠지만 새콤한 맛을 즐기지 않는 여동생에게는 별로였나 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이 각기 다른 식사를 잘 마쳤다.           




보슬비 내리는 거리를 되돌아 집으로 갔다. 케이크에 불 붙이고 축하할 2부 행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손을 씻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자리를 잡고 아빠가 성냥에 불을 붙이셨다. 아이가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 중 하나다. 아니 누구에게나 미리 행복할 준비 가 허락된 몇 안 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동생과 내가 성냥의 불씨를 성화처럼 이어받아 여러 개의 초로 옮겨 붙이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엄마가 벌떡 일어서고 아빠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미처 불씨가 다 꺼지지 않은 성냥을 아이가 들었고 불씨가 사위어 가며 성냥의 머리가 아이의 목에 떨어진 것이었다. 고스란히 빨간 불빛이 남아있는 채였다. 그것이 옷 속에 들어간 것인지 아이는 연신 비명을 질러댔고 우리 가족은 좀 전까지 세상 행복할 만반의 상태에서 갑작스레 난장판이 되었다.


열기 식힐 것을 가져오라는 아빠의 말에 나는 냉동실에서 얼음 한 조각을 꺼내 불씨가 목에 남긴 하얀 흔적 부위에 댔다. 몇 미터에 불과한 거실이 운동장만큼 길게 느껴졌다. 더운 날씨에 얼음은 곧장 내 손과 아이의 몸의 온기에 녹아 물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나친 차가움은 뜨거움과 어딘가 닮지 않았던가? 그 느낌을 처음 겪어본 아이는 두 눈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어댔다. 처음 보는 뜨거운 맛에 충격을 받았는지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엄마는 상태 수습도 끝나기 전에 자동반사적으로 성냥을 아이 손 가기 좋은 테이블 위에 둔 아빠를 탓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나를 도우면서도 엄마의 아빠 탓에 가세했다. 나는 아이를 달래며 의미 없는 탓하기를 말렸다. 그 사이에도 아빠는 아무런 말 없이 다 듣고 계셨다.


다행히 타다 만 성냥은 엄마의 우려와 달리 아이 옷 속으로 들이지 않았고 더 이상의 상처는 없었다. 성냥은 목을 맞고 튕겨 거실 바닥에 누워있었고 여전히 빨간 불씨를 달고 있었지만 바닥은 한치의 그을음도 없이 멀쩡했다. 때로 어떤 사건은 고스란히 그 가족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해도. 엄마도 동생도 오래도록 쌓인 아빠에 대한 못 미더움과 불만을 이렇게 터트린 셈이었다.


아빠는 평소 많이 덜렁대고 지나치게 느리며 매사 신중한 엄마와 달랐다. 그럼에도 별 탈 없이 직장생활을 30년 해낸 사람이기도 했다. 여전히 이런저런 사회생활을 이어가고 계신다. 어쩌면 우리는 아빠의 총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의 모습만으로 아빠를 지나치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것 같은 아빠 대신 고생 많은 엄마의 선악구도를 당연시하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거리를 두고 아빠를 바라보게 되면서 내가 가진 엄마에 대한 양가감정과 내면 아이를 자꾸 들여다보며 어린 시절 막연하게 가진 아빠에 대한 원망은 나의 고유한 것이기보다는 엄마가 아빠를 바라보고 평가하고 소망했던 많은 감정들이 전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도 그랬다. 못 미더운 남편이 결국 사고를 칠 줄 알았다는 논리가 자동으로 나왔다. 평생 그 논리를 무의식 중에 받아들여 아빠를 대해 온 우리 자매는 아빠가 정말로 어딘가 부족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그런 사람인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아빠와 많이 닮은 사람이기에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며 아빠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면서 옹호랄까, 자기변명과 합리화 같은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를 달래 응급처치를 한 다음, 다시 엄마의 생신 축하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어디론가 빠져나가버린 흥겨운 기운을 억지로 그러모아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불었다. 평소 누구의 생일이든 상관없이 자기가 주인공인양 촛불을 후 불어 꺼버리던 아이는 무섭다며 저 멀리 주방으로 달아났다가 촛불이 꺼지자 돌아왔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귀여움에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함께 축하를 마무리하고 케이크를 잘라 각자의 앞접시에 덜어 먹으며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혼이 많이 났으니 앞으로는 불조심하자."




photo by Annie Spratt@unsplash


그 저녁은 주말 내내 여운으로 남았다. 우리는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을 맞아 행복감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증명사진 찍기 등의 이벤트를 계획한다. 그것은 찰나일 뿐 일상 속에서는 가족 고유의 모습이 결국 나오게 된다. 각자의 문제와 고질적인 습관, 서로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찍은 증명사진처럼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것이 비록 카메라를 의식하며 짓는 웃음처럼 화기애애한 모습이 아니더라도 불화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않을까? 딱 자신만큼의 한계가 모인 우리 가족의 한계, 문제점, 그 모든 것들이 충돌하며 몇십 년간 만들어낸 무늬의 결대로 살아가며 때로는 인내하고 갈등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미안함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빠와 그것 때문에 평소보다 아빠를 더욱 탓한 엄마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에는 나는 이미 그들 하나하나를 너무도 잘 아는 나이가 되었다. 8년간 물리적 거리를 두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 된 것들까지 포함해서. 다음 날 새벽같이 아이의 상처가 궁금해서 각자 전화를 온 두 분의 심정에 감사함을 느끼며 아무런 이상 없다고 안심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아들 못지않은 강한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눈에 띄는 흉터 하나 없이 고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두 분의 무수한 세월 속 마음 씀씀이 덕분임을 깨달았다. 진짜 생신날 아침 엄마께 통화를 하며 감사함을 가득 담아 축하의 인사를 드렸다.


사진사가 선택해 달라고 메일로 보내온 증명사진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부족했다. 활짝 웃는 이상적인 가족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긴장하고 어색하고 힘을 주고 있는 표정들을 보며 이것이 내가 자라나 앞으로도 함께할 가족의 진짜 모습임을 인정하게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있지만 그것 덕분에 때로는 멀리 갔다가도 돌아와 편안히 쉴 수 있었고 밉고 싫어 벗어던지고픈 감정이 더 나은 나를 꿈꾸게 했다.  3년 만에 찍은 가족사진은 예상과는 꽤나  달랐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가족사진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대로 인화해달라는 답장을 써 전송 버튼을 눌렀다. 엄마의 65번째 생신날 오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성비로 유예한 진짜 행복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