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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Jun 29. 2020

가성비로 유예한 진짜 행복을 찾아서

욕구에 솔직하지 못한 엄마가 아이를 통해 알아가는 지금의 행복

오랜만에 아이 손을 잡고 대형마트에 갔다. 특별히 살 물건은 없었지만 아이가 관상어와 곤충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지인이 키우는 물고기를 조금 나눠준다고 해서 먹이가 필요했고 마침 사용하던 카드에서 실적액을 채웠다고 상품권 교환 바코드를 문자로 보내준 참이었다. 교환처가 그 마트였기 때문에 '잘 되었구나.' 싶어 나들이 삼아 가 보았다.


입구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물고기 먹이 외에 쇼핑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제일 먼저 무인 상품권 교환기로 다가가 문자의 바코드를 스캔했다. 만 원짜리, 오천 원짜리 각각 한 장의 상품권이 출력되었다. 공돈이 생긴 느낌이 들자 '이 정도 금액 안에서 뭔가 사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며 '과소비 따윈 하지 않겠어!'라고 굳게 먹은 마음이 살짝 풀어졌다.


아이가 원하는 물고기 코너부터 갔다.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먹이를 사려고 가격을 보니 인터넷 가격과 차이가 많이 났다. 배송비용을 감안해도 쿠폰 할인을 받을 수가 있으니 인터넷에서 사는 편이 나았다. 당장 먹이를 사자는 아이를 이유를 설명해 달래고 종이 포일과 고무장갑 두 개를 사서 다시 물고기를 보러 갔다가 계산대로 향하려 했다.


마트까지 온 아이가 장난감 코너를 보지 않고 돌아갈 리 없었다. 구경만 하겠다는 아이의 다짐을 믿고 2층으로 향했다. 과자를 사 달라는 부탁이라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줄 생각이었으나 장난감은 어림없었다. 로봇과 블록 장난감 코너에서 눈에 띄는 제품으로 달려가 손으로 만져보면서도 엄마가 안 사줄 걸 아는지라 이내 내려놓았다.


제철을 맞아 가장 보기 좋은 곳에는 물총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비싸고 좋아 보이는 것부터 몇 번 쓰면 부서질 듯 조잡한 제품까지 사이좋게 놓여있었다. 곧장 달려간 아이는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물총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수동으로 움직여야 하는 피스톤도 밀어보고 물이 나오는 입구의 모양새를 살폈다. 그러다 정중앙에 있는 크고 화려한 물총을 손으로 잡았다.


"엄마, 이거 갖고 싶은데... 안 되지?"

어릴 때부터 장난감을 거의 사주지 않은 엄마를 너무나도 잘 알지만 아이는 매번 용기 있게 도전한다. 참을 수 있는 마음이 갖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아이가 애처로운 눈빛과 행여나 모를 기대감을 실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일 비싼 제품도 아니었는데 상품권으로 바꾼 금액에서도 돈을 꽤 보태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열한 살이나 차이 나는 사촌 형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오래되고 투박한 물총을 물려받아 써 왔다. 피스톤이 잘 안 움직여 물총 쏘는데 애를 먹던 걸 생각하니 하나 사줘도 될만한데 복잡한 생각들이 동시에 들었다. 1) 필요 없던 물건을 갑자기 사는 것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나쁘며 2) 버려지면 무해할 플라스틱을 가급적 집에 들이고 싶지 않고 3) 어차피 몇 번 가지고 놀고 나면 잊힐 물건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사는 경제적인 문제 4)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습관적으로 소비하며 진짜 중요한 선택을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떠올랐다.


한편 가)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잘 지내준 아들에 대한 미안함 섞인 짠함 나) 옆에서 제일 비싼 모델을 두 개나 망설임 없이 집어가는 사람을 보며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다) 적당한 가성비의 물건을 소유하는 습관이 반복되며 아이가 정말 갖고 싶은 물건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면 어쩌나 우려되는 심정도 동시에 들었다.


오래 쓸 물건이면 가능한 예산 내에서 아니 때로는 조금 초과해서라도 돈을 더 모아 제일 마음에 들고 좋은 제품으로 고르는 편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잠시 쓰고 말 물건은 철저히 가성비를 따진다. 갖고 싶은 물건을 다 살 수 있을 만큼 넉넉했던 적은 거의 없었고 오랜 백수 시절 동안,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 대신 가격이 저렴하면서 비슷한 효용을 주는 물건을 골라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좋게 말해 알뜰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다소 지질해졌다. 지금도 그 습관은 유효해서 물건을 구매할 때는 철저하게 이원화된 규칙을 적용한다.

 

내게 있어 대부분의 육아용품은 후자였다. 몇 안 되는 장난감도 얻거나 빌려 썼다. 자라나고 관심사가 바뀌는 아이의 장난감이며 각종 소모성 물품은 환경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좋지 않을뿐더러 잠깐의 부모 만족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게 갖고 있었기에 일시 귀국한 남편의 선심성 장난감 쇼핑에 매번 태클을 걸어왔다. 물론 늘 졌지만. 그 관념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작용했다.


아이에 대한 짠한 마음과 기존의 소비 철학을 절충한 결과, 아이가 원하는 크고 화려해서 비싼 물총 대신 몇 년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제품군 중에서 칠천 원 정도 하는 작은 모델을 골라서 내밀었다. 당연히 아이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몇 번 거부하다 이내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없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고도 처음 고른 총에 미련을 못 버려 계속 다시 만져보았다.


못 사 줄 금액도 아닌데 눈을 딱 감고 사 줄까 고민도 됐다. 망설이던 순간 아이가 그 총을 고른 이유를 알게 됐다. 물총 입구의 구멍이 다른 제품들은 반으로 갈려있는데 그 제품만 동그랗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삼 만원에 가까운 금액은 부담됐다. 내가 고른 제품 라인 중 크기가 더 큰 제품의 입구가 동그란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내밀었다. 가격은 더 비쌌지만 아이가 고른 물총 가격에서 두 개 사고도 잔돈이 많이 남는 금액이었다.


아이의 의사를 최대한 충족시켜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원해도 모든 것을 다 들어줄 수는 없는 법이다. 짠한 마음에 미안해지면서도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결국 아이는 아쉬움을 표현하면서도 엄마의 의견에 수긍했고 우리는 계산대로 향하기 전, 충동적으로 세일 중인 아동복 코너에 들러 여름 반팔 티셔츠와 리넨 반바지를 사서 돌아왔다. 필요하긴 했지만 꼭 샀어야 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목이 마르다는 아이를 위해 집 앞 지하철역 근처의 호떡 카페에서 생과일주스를 주문하고 꿀호떡을 간식 삼아 먹으며 쇼핑한 물건들이 가격과 나란히 찍혀있는 전자영수증을 다시 보았다. 상품권만 오천 원을 받으러 가서 필요했지만 꼭 오늘 사야 했던 것은 아닌 고무장갑 두 개와 종이 포일을 샀다. 아이가 정말로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 물총 대신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는 제품을 골라주고 미안함에 아이 옷을 사주었다. 과연 나는 제대로 된 소비를 했던 것일까?


옷을 사 주는 대신 아이가 원하는 제품을 골라주고 다른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후회 없는 쇼핑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지키려 하다가 더 필요 없는 것으로 아이의 아쉬움을 달래려 한 나. 결국 내 마음에도 아들 마음에도 썩 들지 않는 실패한 쇼핑을 하고 돌아온 셈이었다.

 

리넨 바지는 아이가 고른 것이었지만 집에 돌아와 걸쳐보더니 길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결국 반품을 하기로 했다. 물총은 오자마자 포장을 뜯어 목욕탕에서 샤워하면서 신나게 가지고 놀았다. 피스톤도 잘 듣고 발사력도 훌륭해 처음 마음에 들어했던 물총 따위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토요일 오후의 물총 에피소드는 긴 여운을 주었다. 물총으로 시작되었지만 비단 물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래전 경제력이 없던 시절 갖게 된 가성비 철학은 알뜰하다는 착각을 잠시 주고 이내 다른 소비로 못 채운 욕구를 위로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많은 물건 대신 꼭 필요한 것을 마음에 드는 것으로 제대로 지니자고 거듭 다짐하지만 아직도 많은 선택은 가성비로 결정된다.


최대 만족을 언젠가의 미래로 유예하고 지금은 적당히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소유한다. 채워지지 않은 부분은 다른 추가적인 소비로 위로하며. 그러나 그 위로는 잠시일 뿐. 정말 원했던 것을 가지지 못한 아쉬움은 그 소비에 대한 미련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또 다른 연쇄 소비와 소유로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현재에 솔직해지지 못한 결과다.


'아직 어리니까 이만큼만. 지금은 어차피 못 누리는걸. 이 정도면 충분하지.' 늘 이유를 대고 욕구를 유예하며 적당한 타협을 해 왔던 일들이 장난감 구입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덜 자란 미완성으로 보며 아이의 선택과 의사를 수없이 ‘다 자란 완성형’의 내 의사로 가로막고 가성비로 따지고 말았던 선택들이 미안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의 오랜 가성비 강박이 아이의 선택 또한 그렇게 만들까 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생각 많고 후회도 많은 엄마의 아쉬움을 알 턱이 없는 아이는 새로 산 물총을 제 얼굴로 쏘아 올리며 세상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꾸밈없는 기쁨 가득한 웃음이 욕실 벽면에 맺힌 물방울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조금은 먹고 살만 해졌어도 여전히 매사를 당장 눈 앞의 금액으로 환산하기 바쁘고 다른 것으로 무마하고 사는 내가 부끄러워져 의기소침해 있던 엄마에게 아이는 그 따위 지나간 일 따윈 털어버리라는 듯 새 물총의 발사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시원하게 물을 쏘아댔다.


"강력한 익스텐션(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싸움 놀이 때 추임새로 매번 쓰는 말)!!"

"두고 보시지. 으하하하. 무시무시한 복수를 해 주겠어~~"

아이의 공격에 작은 바가지에 물을 한가득 퍼 담아 아이에게 뿌리는 시늉을 했다. 엄마가 가성비를 따져 산 물총을 부여잡고 전투태세를 갖춘 채 '까르륵' 넘어가는 아이의 표정에는 결코 가성비로 따질 수 없는 행복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미완의 아이로부터 이제는 좀 완성된 줄 알았던 나는 오늘도 한 수 배웠다. 너무 따지고 생각하느라 고민 말고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에 솔직해질 것을. 현재의 행복을 미래의 나중으로 계산하며 유예하지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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