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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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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Sep 07. 2020

한물 간 슈퍼히어로를 일으키는 것들

아들과 나 : 무기력을 극복하게 만드는 아들의 미션  

주말 내내 눕고 싶은 기분으로 보냈다. 책을 읽어주다가도, 놀다가도 금세 초점이 흐려졌다. 뭔가를 보고 있으면서 실은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누울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구나.' 간절하게 바랐다. 목소리로 이미 엄마의 상태를 눈치를 챈 아들이

"엄마!"

하고 부르거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면 잠시 돌아왔다 금세 초점이 나가기 일쑤였다. 요즘 매일매일 이렇다.


아이가 더 어릴 땐 아무리 피곤하고 잠이 와도 버티고 버텼다.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애를 썼다. 그땐 마음을 먹으면 몸이 따라오던 때였다.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그 열정에 피로함을 녹였다. 사명감에 불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에 다름없었다.


제 아무리 아이언맨이나 배트맨도 늙고 지치기 마련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체력과 흥미가 확장되는 남자아이에 비해 만성피로와 운동부족, 골다공증까지 지병으로 갖고 있는 나이 많은 엄마는 그야말로 이젠 퇴물이 되어버린 슈퍼히어로처럼 급속도로 지쳐갔다.


빛나던 필살기도 구태의연해졌고, 체력은 물론 지구력도 팍팍 딸리기 시작했다. 그런 슈퍼히어로를 예전과 같은 경의로 한결같이 바라보며 사랑해주는 변함없는 팬이 있어 젖 먹던 힘을 내며 버티고 있지만 왕년의 영웅은 조금씩 느낀다. 천하무적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과거는 이젠 불가능하다는 걸.


힘이 빠져가는 과거의 히어로에게 의지하는 대신,아이는 혼자만의 시간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고 있다. 내가 지쳐 힘이 빠져 있을 때나 할 일로 부산할 땐, 읽을 책을 꺼내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거나 무언가를 찾아 잘 논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볼 때면 흐뭇함 속에 촉촉함이 서린다. 아직도 엄마와 함께 노는 시간을 기다리는 걸 잘 알기에.


알면서도 그 날은 정말 눕고만 싶었다. 손과 팔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무력감이 지속되어 그런 것일까?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고만 싶었다. 결국 <쿵푸 팬더>를 틑어주고 정신없이 낮잠을 잤다. 체력과 멘탈관리가 도무지 되지 않는 완전한 KO였다.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기는커녕 그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몽롱하고 의지 하나 없는 빈 껍데기 같은 기분으로 하루가 흘러갔다. 오후 느지막이 놀이터로 갔다. 일주일 사이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처럼 높이 그네를 굴릴 수 있게 된 아이를 보며 기쁜 한편, 잃어버린 에너지를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되찾아 채울 수 있을까? 눈이 부시게 힘찬 몸놀림을 하는 아이를 눈으로 좇으며 문득 생각했다.


온몸이 쑤시고 근육이 흐물거리는 증세가 지속됐다. 기운을 차리고 싶은 기분 조차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가 아리고 시린, 급속도로 늙어버린 나는 텅 비고만 싶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할 힘도 없이 흐물흐물 하루가 흘러갔다.


다시 날이 밝았다. 매일 일어나던 시간에 눈을 떠 냉기 없는 물을 한 잔 천천히 마시고, 기다리던 시즌 2가 시작된 드라마의 전날 방송 편을 보았다. 여전히 찌뿌둥했고 몽롱했지만 젓 먹던 힘 대신 아이의 웃는 얼굴을 생각했다. 밝아오는 해를 마주 보며 약속한 김밥을 만들어주려 손을 놀렸다. 채소를 볶고 계란지단과 햄, 어묵을 준비하며 등과 이마 등에 구슬땀을 흘렸다.


역시나 눕고만 싶은 몸과 마음을 토닥였다. 겨우 이틀 주어진 주말인데... 남은 하루는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슬럼프에는 몸을 움직여보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환한 햇빛에 빨래를 말리고 싶어 세탁기를 돌리고 무기력한 요 몇 주 대충하고 넘겼던 욕실 청소를 시작했다.


군데군데 물때가 만든 붉은 곰팡이와 머리카락, 녹은 비누가 만든 얼룩들이 보였다. 세제를 곳곳에 뿌리고 솔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줄눈의 반짝이가 싫어서 준공 후 그대로 둔 타일 사이 흰 시멘트의 얼룩들이 조금씩 옅어지고 또 옅어지면서 화사해지기 시작했다.


타일과 욕조 사이 실리콘에 고인 붉은 곰팡이들도 솔을 바꿔 문질러 없앴다. 세면대의 비누 받침대에 고인 녹은 비누들로 세면대와 욕조의 스테인리스 수도꼭지에 윤기를 냈다. 샤워기를 틀어 물로 씻어내자 마치 새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사이 아이는 만화가 끝나고 혼자 책을 보고 있었나 보다. 아직 그림만 보는 수준이지만 가끔 목소리가 들려서 내다보면 혼자 더듬더듬 글을 읽고 있다. 노랫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미 수십 번을 읽어서 내용을 꿰고 있는 장면인데도 또 그곳을 읽고 있다.


아이가 더 어릴 땐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달래다 포기하고 등에 업거나 욕실 문 앞에 앉혀두고,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는 틈을 타 청소를 하기도 했다. 이젠 혼자 밖에서 만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있으니 커도 참 많이 컸다. 


아이와 밀착해서 보낸 수년간의 시간이 이렇게 조금씩 과거형이 되어간다. 아직은 고맙게도 엄마의 퇴근시간과 주말을 기다리며 할 것들을 가득 계획하는 아이의 마음이 애틋한 만큼 왕년의 힘은 커녕 자주 무기력해지고 마는 요즘이 미안하다.


아이는 늘 준 것 이상을 주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알면서도 매번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불완전한 나를 의심 없이 사랑하는 한 존재 덕분에 지쳐 다 놓고 싶다가도 다시 히어로처럼 포기하지 않고 일상을 이어갈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보다.


욕조의 물 빠지는 구멍에 낀 물때, 머리카락까지 정리하고 여기저기 오래된 얼룩 위에는 과탄산 소다를 뿌렸다. 한참 놓아두었다가 물로 씻어내면 한결 더 깔끔해질 것이다. 자주 맨발로 욕실로 뛰어드는 아이에게 피부에 닿지 않게 꼭 슬리퍼를 신고 가라고 일러주었다.


어제 놀이터 갔다가 들렀던 마트에서 사진을 보고 아이가 골라 집어온 밀 키트 봉지를 뜯었다. 소스를 냄비에 붓고 김밥 만드느라 가득 볶아둔 채소와 고기를 꺼내 섞는다. 바글바글 끓는 물에 생면을 집어넣는다. 기대감에 가득 부풀어 있는 아이의 눈빛을 보며 말한다.

"엄마가 진짜 맛있게 만들어줄게."


배가 부르다면서도 아이는 1인분을 다 먹어치웠다.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식욕이 돌았다. 내 몫의 음식을 후루룩 다 비우고 아이의 온 얼굴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었다. 이미 만들어진 소스에 채소를 더 한 것뿐인데

"진짜 맛있었어. 엄마는 못하는 게 없네. 다음에 또 해 줘"

라며 엄지 척을 날려주었다.


너무 열심히 그네를 타는 바람에 양쪽 어깨가 아파 놀이터를 하루 쉬기로 한 아이가 어제 보았던 <쿵푸 팬더>를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쿵푸 팬더>가 재생되는 사이, 낮잠을 자려다 반찬들을 만들었다. 아이의 엄지 척이 사그러 들던 초능력 에너지의 불씨를 살린 것인지도.


깻잎 김치를 만들려고 정성 들여 깻잎들을 씻었고, 애호박과 빨강과 노랑 파프리카를 볶고, 감자채도 볶았다. 여전히 온몸은 나른했고 만사가 귀찮았지만 힘을 내어보기로 했다. 조금씩 움직여 몸속 구석구석 스며든 무기력의 기운을 빼냈다. 만화에 몰입해 폭소를 터트리던 아이가 흥분 가득한 얼굴로 뛰어와 외쳤다.

“엄마, 좀 있다가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해 줘.”


거듭되는 미션을 완수하며 성장하고 강해지는 슈퍼 히어로처럼 아이의 미션에 맞춰 움직였다. 냉장고에 든 얼린 우유 얼음과 냉동 딸기를 갈리기 좋게 미리 꺼내 두고 요거트 가루도 부었다. 이제 늙고 지쳐 우주 최강의 힘으로 지구를 지키지는 못하겠지만 일곱 살 아이의 작은 소망을 조금씩은 이뤄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미션을 차곡차곡 끝낸 하루 끝에 가슴 따스한 보람이 있기를 바라며 끝없이 몰려드는 무기력에 맞서 싸울 힘을 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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